꽃의 감성, 대쪽 지성 본사 사장 ssnam48@kjdaily.com

2015년 09월 30일(수) 19:59

추석 연휴 동안 광주·전남은 ‘직녀에게’ 시인 문병란(향년 80세) 선생님을 저 멀리 떠나보냈다.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문병란 선생의 제자였던 이낙연 전남도지사의 추모사에는 울림이 컸다. 기자출신인 이낙연 도지사는 저항하면서도 서정을 놓지 않고, 비판하면서도 미학을 포기 하지 않은 분, ‘꽃의 감성’과 ‘대쪽의 지성’을 겸비한 민족시인이라고 추모했다.

‘대쪽의 지성’ 하면, 언뜻 ‘선비’가 떠오른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화정’의 한음 이덕형 같은 이를 우리는 ‘대쪽 선비’라 한다. 엄격한 도덕적 신념을 지닌 조선시대 사대부, 정갈한 도포자태를 뽐내며 기품 있고 강직한 모습, 갓 너머로 비치는 명민하고도 굳건한 눈빛···. 선비의 가장 정확한 정의는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다. 남명(南冥) 조식(1501∼1572)같은 이가 진정한 선비다. 그는 늘 몸에 ‘성성자(惺惺子)’라고 불린 방울을 달고 다녔는데, 이유는 걸을 때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해서였다.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자기 자신을 단칼에 베어버리겠다는 일념에서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도 차고 다녔다.

선비가 끊임없이 내면을 갈고 닦는 이유는 그 내면으로 밖을 비추기 위해서다. 그런 내면이라야 공익을 먼저 생각하는 봉사정신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진정 필요한 리더십은, 문병란, 이덕형, 조식처럼 올곧은 선비 정신으로 무장한 뒤 ‘대쪽의 지성’으로 사회를 돌보는 마음이다.

추석 연휴가 끝난 후,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추석민심이란 타이틀을 내놓고 조선 선비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추석 민심을 ‘소리 없는 비명’이라고 전했다. 도시서민과 자영업자, 소상공인, 농민, 중소기업 사장들의 소리없는 비명을 추석에서야 들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명절 끝에만 하는 통렬(痛烈)한 반성 역시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게 만든 주범은 정치권이고 정쟁에만 몰입, 민생고 해결에 관심 없었던 정치권 책임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에만 서민의 삶이 부쩍 어려웠나? 아니다. 추석 전에도 서민의 삶은 절망 그 자체였다. 가계부채는 1000조원을 넘은 지 오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중은 2015년 말 37.5%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청년실업률은 10%대로 진입했고, 체감실업률은 37%대에 이르고 있으며, 양극화 추세는 악화일로에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 비명’에 귀 막고, 이전투구 진흙탕 싸움만 계속했다. 앞으로 7개월 남은 총선, 2년3개월 남은 대선 때문에 새누리당은 친박·비박, 새정치민주연합은 친노·비노로 갈려 명분·실리도 없는 권력분쟁으로 날을 새고 있다. 급기야 일부에서는 파열음을 내고 분당·신당·정쟁으로 이 나라의 정치를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다. 따라서 추석민심을 통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사흘도 못갈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물질적 번영과 민주화에 따른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백성의 삶’과 ‘국민의 삶’의 질은 확연히 다르다. 현재 개인 행복지수는 후진국 수준으로 낮고 자살률은 OECD에서 가장 높다. 선비가 살았던 과거에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가정의 화목과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고, 동방예의지국이란 칭송을 들을 정도로 예의바른 문화가 있었다.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면서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끌었던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른이 바로 선비다.

현재와 과거의 차이는 사실 ‘리더십’의 차이다. 현대의 지도자는 국민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사람의 심성과 태도를 바꿔야 하는데,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정치지도자다. 지도자의 리더십은 낮은 수준에서는 힘과 돈, 높은 수준에서는 존경으로 발휘된다. 우리 정치인들이 전근대 전통사회 선비에게서 배울 것이 바로 ‘존경의 리더십’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좋은 것은 남에게 주고 싫은 것은 자신이 떠맡는 사람을 존경한다. 선비가 존경받는 이유는 선우후락(先憂後樂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 전에 먼저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한 뒤에 나중에 즐거워한다) 정신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선비는 ‘선우후락 정신’으로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고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이끌었는데, 그 요체는 룰이 아니라 ‘봉사와 헌신, 덕(德)’이었다. 선비는 자신을 가장 낮추는 덕을 통해 가장 큰 존경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지도자들에겐 다시 21세기형 선비정신이 필요하다. 복고적인 과거의 세계관으로 돌아가자는 것 아니다. 새로운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신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시대정신으로서 선비정신 말이다. 검소함과 겸손함을 갖추고 낮게 행동하고 처신하며 수많은 정보와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도 삶의 길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살아 갈 수 있는 사람, 평범하고 소박한 풍모를 지니고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원칙을 확고히 세워 나설 때는 분명히 나설 수 있는 사람, 인문학적 소양과 전문지식을 적절히 갖추어 모나지 않게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이치를 아는 사람, 시청(視聽)이 아닌 견문(見聞)을 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을 비울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시대 진정한 선비다.

공자는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 군자요 다른 이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 소인배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인들은 실의에 빠진 국민, 위기의 한국에 대해 무한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사사로움보다 공익, 꼼수보다 정수, 자신보다는 국민, 정치이익 보다 국민 아픔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 꽃의 감성, 대쪽 지성으로 말이다. /ss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