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 본사 사장 ssnam48@kjdaily.com

2015년 10월 14일(수) 19:29

고등학교 국사 시간이었다. 첫 수업 때 국사선생님이 칠판에 크게 ‘역사’라고 쓰고 학생들의 눈을 응시하며 ‘역사가 뭐냐’ 물었다. 친구가 손을 들고 ‘과거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래 과거의 기록 맞다, 그러면 물어보자, 역사는 왜 배우냐?’ 한 친구가 ‘시험보기 위해서요’ 했다. 웃음바다가 되었다. 선생님은 장난기를 잠재우며 ‘역사는 예전에 잘못한 걸 되풀이 안 하려고 배우는거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라 권했다. 필자는 입시에 바빠서 곧장 그 책을 못 읽고 최근에야 ‘역사란 무엇인가’를 심독했다.

지금 한국을 마비시키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보면서 ‘역사란 무엇인가’ 자문해본다. 도대체 그 역사란 게 뭐 길래 정치권이 나서서 이 난린가. 역사란? 혹자는 과거의 기록물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승자의 일기장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돌고 도는 시간의 반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란 무엇인가’ 저자 카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과거는 단지 지나온 역사적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만든 실체 그 자체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야 미래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인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여·야 정치권이 역사교과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단순하게 바라보면 지금 학생들은 미래 유권자다. 그들이 투표권을 얻었을 때 누굴 찍을지 역사관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지금 여·야 정치권 싸움은 미래 유권자 확보 문제로 귀결된다. 보수정권은 가급적 보수화된 학생들을 길러내는 것, 진보정권은 최대한 진보화된 학생들을 길러내는 것이 미래 권력을 잡는데 유리할 것이다. 보수화된 학생이 많고, 그들이 자라 보수적 유권자가 된다면 보수 세력의 지배는 공고화되고 그들은 기득권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 진보화된 학생이 많고, 그들이 자라 진보적 유권자가 된다면 지금의 사회 지배세력은 바뀔 수 있다. 결국, 지금 역사전쟁은 미래 전쟁이다.

그런데, 이 정부 입장을 대변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황우여 교육부총리는 국정교과서를 그냥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 불렀다. 이 말 자체가 틀렸다.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이 옳고, 어떤 관점이 틀렸는지를 획일화하거나 통일화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과 인류보편사적 관점만 용인된다면 다양한 해석학적 시도를 올바르지 않다고 막을 일도 아니다.

일본 아베 정권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침략전쟁과 그 과정에서 발생했던 학살과 위안부 문제 등의 전쟁 범죄들을 은폐하려는 것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 스스로가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여 정권이 나서서 역사 교육을 획일화하고 독점하려 한다면 더 이상 일본을 비난할 명분을 찾기 어렵다.

실패 사례가 있다. 2006년 이명박 정부의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논쟁, 2013년 뉴라이트, 새누리당, 재벌들의 역사인식을 옹호하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탄생시켰지만 이 교과서를 채택했던 일부 학교에서 지역시민사회단체, 학부모, 학교동문회, 고등학교 재학생, 그리고 심지어 고등학교 신입생들이 나서서 채택취소를 요구하였고 결국 이 요구가 수용되면서 채택률 0%로 그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이번 역사교과서 논쟁이 얼마나 소모적인지 잘 확인시켰다.

그렇다면 보편타당한 역사교육 원칙은? 좌우 모두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적 공과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제공하여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적 상상력, 역사적 비판력, 역사적 판단력 등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념대결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학문적 차원으로 접근, 미래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역사적 책임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역사교육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높은 학문적 자유를 보장하고 커리큘럼에 정부가 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하며 다양한 보충교재사용을 허용하여 역사자료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특히 정치적, 종교적 목적으로 역사교육을 이용해서는 안 되며 비판적 사고, 분석적 학습과 토론에 대한 능력배양을 목표로 역사의 복잡함을 강조하여 상대적이고 다양한 관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제4항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이미 1992년에 판결을 통해 이러한 헌법 정신에 부응하고 교육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국정제’보다는 ‘검인정제’를, ‘검인정제’보다는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2013년 유엔총회에 제출된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이란 보고서는 ‘다양한 종류의 역사 교과서 가운데 교사가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에서 획일적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는 나라는 북한, 베트남, 스리랑카, 몽골 정도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그렇다면 올바른 대화법·대화룰을 알아야 한다. 좋은 대화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 혼자 대화를 독점하지 않아야 한다. 의견을 제시할 땐 바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임의로 화제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 일반 국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런 대화룰을 알고 있을진대, 수백년 수천년 수만년 역사와 대화를 시도하는 역사책이 기본 대화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역사는 정당한가? 그 역사는 정의로운가? 그 역사책은 과연 배울만한 책일까?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으려면, ‘과거 역사’와 진솔한 대화, ‘현재 역사’와 부끄럽지 않은 대화를 해야 한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요 미래의 길잡이니까. /ss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