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시계와 나의 시계는 함께 굴러간다 주복임 |
| 2015년 11월 18일(수)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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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쉽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퇴근 후 멀리 사는 딸아이와 전화하는 도중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손자의 제법 야무진 이야기 솜씨에 깜짝 놀랐을 때, 오래된 벽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옛 사진 속 근사한 청년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내가 시간의 흐름 속에 서있음을 깨닫곤 한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것을 핑계삼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시계가 있다. 나는 나대로 나만의 시계를 가지고 있고 내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시계에서 살고 있으며 누구나 자기만의 초침과 분침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요 근래 나는 엄마의 시계가 남들보다 빨리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지난해 받은 수술 후 복용하시게 된 약이 갑자기 문제가 되어 아침부터 코피를 쏟으셨는데 너무 놀라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노년기에 접어드시면서 계절이 변할 때마다 식사도 부쩍 적게 하시곤 해서 ‘더 드시라.’ ‘안 먹는다.’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는 것 역시 다반사였다. 어째서 내가 한 말을 잘 듣지 않으실까 야속한 마음도 들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내가 그렇게 엄마의 일이라면 펄쩍 뛰었던 것도 사실 엄마의 시계가 나보다 항상 먼저 가고 있다는 사실이 목구멍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리라. 직장에서 집에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느라 바쁘다는 것을 이유로 그간 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는데. 달력을 넘기며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엄마의 시계는 나보다 먼저라는 것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흰 머리가 나고 손주도 있는 이미 공식적인 할머니가 된 나에게 엄마는 아직도 걱정거리라는 것. 엄마의 염려와 노심초사는 내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엄마는 항상 나보다 먼저 주무시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기말고사를 앞두고 비싼 과외공부를 하는 나의 라이벌을 이기기 위해 나는 이틀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해서 공부한 것을 모조리 외워버렸다. 정작 시험 당일에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시험을 그르치고 울어서 눈이 퉁퉁부어 돌아 온 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기를 구워 주시며 “내 딸 장하다 전과 두 권을 다 외운 사람은 대한민국에 우리 딸 밖에 없지! 엄마가 1등 줄게”하시며 꼬옥 안아주셨다. 그 따스한 엄마의 품과 엄마의 향기가 지금까지 무수히 치러진 내 인생의 시험들을 무난히 헤쳐오는 데 가장 큰 힘이 됐다.
자식이 어른이 되고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을지라도 자식은 자식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맺어져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그것은 유효하다. ‘밥은 먹었느냐, 문은 잘 잠가라.’등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할 법한 잔소리를 아직까지도 나에게 하시는 모습을 보면 가끔씩 이 어쩔 수 없는 엄마와 딸의 숙명적인 관계에 웃음이 비죽이 나오곤 한다.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 일상에 치여 그간 나를 돌아보고 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시간에 무뎌진 나의 무심함 탓이다.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도, 잠깐 멈출 수도 없다. 엄마와 나 사이의 시간도 그러하다. 나보다 앞선 세대를 살며 시작된 엄마의 시계, 그리고 엄마보다 한 걸음 늦게 출발하여 나아가던 나의 시계. 그러나 엄마의 시계와 나의 시계는 이제 함께 굴러간다. 가을이 가기 전에 엄마가 좋아하는 추억의 장소를 찾아다니며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