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꿈꾸며 해외인문기획 시네필로 ‘브이 포 벤데타’와 공동체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 |
| 2015년 11월 26일(목)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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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윈스턴은 당의 지령에 따라 지난 신문기사의 내용을 변경하는 기록관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되는 이 작업은 올바른 정보 전달과 국민의 애국심을 드높인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곳에서 국정교과서를 발행하려는 것도 미래세대의 ‘올바른 국가관’과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 줄 수 있는 ‘정상적인 역사교육’을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1984’에서 과거의 신문기사를 수정하는 진짜 이유가 국민의 정치적 관점을 일원화시키고 총체적 예속상태를 지속해, 지배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1984’에서 다루었던 독재국가의 전체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계승한다. 2040년 3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설정한 영화에서 정부는 공포정치를 통해 종교적·민족적·정치적·성적 자유가 없는 독재를 자행한다. “국가의 힘은 단결을 통해, 단결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라는 슬로건이 길가를 장식하고, 언론은 정부의 입맛에 따라 매일 거짓을 보도하고, 통금을 두어 밤의 시간을 지배한다. 뉴스뿐인 텔레스크린과 집마다 설치된 마이크로폰(‘1984’)은 이제 쇼프로그램이 나오는 TV와 전문가에 의한 도청(‘브이 포 벤데타’)으로 진화해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세뇌와 감시를 행한다.
‘브이 포 벤데타’가 ‘1984’와 다른 것은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한 희망을 꿈꾸는 데에 있다.
정부는 무슬림·흑인·동성애자·반정부주의자 등을 무차별적으로 수감한 감옥에서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통해 비밀병기를 만들려는 프로젝트를 시도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감옥의 다섯 번째 방에 수감돼 브이(V)라고 불린 죄수다. 폭발과 화재가 일어나 정부의 계획은 좌절되고, 생체실험에 유의미한 결과가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브이가 탈출해 정부인사와 국가체제에 복수를 단행한다.
하지만 브이 개인의 통쾌한 복수에 이 영화의 희망이 놓인 것은 아니다. 희망의 지점은 브이와 이비, 그리고 시민들로 확산되는 만남과 관계에 있다. 이비는 부모님과 동생이 모두 정부의 정치적 계산과 억압으로 희생당했지만 공포정치의 두려움 때문에 현실에 안주해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브이라고 하는 인물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정의와 용기, 그리고 자유를 깨닫게 된다.
사회학자 퇴니스(F. Toennies)는 구성원의 결합의지가 본연적인가 합리적인가에 따라 사회가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구분된다고 봤다. 공동사회(Gemeinschaft)는 가족·친족·시골마을·민족과 같은 전통적인 집단으로서, 이를 이루는 조건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은 무조건적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유대를 구성한다. 하지만 공동사회의 조건인 땅·피·인종은 집단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이나 집단 내·외부의 타자에 대한 억압의 근거가 되기도 하다는 한계가 있다. 한편, 이익사회(Gesellschaft)는 도시·정당·회사·국가 등 구성원의 계약·조약·협정에 의한 단체로서, 구성원 개인의 선천적 한계를 넘어 합리적 사유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익사회의 조건인 개인의 선택은 과연 순전히 자유로울까? 이비는 가족이나 민족공동체와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의 요소가 부재한 도시의 직장인이지만 여전히 공포정부를 두려워했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다. 합리적 의지에 의한 이익사회라 할지라도 원리나 기준, 또는 이념을 전제한 공동체는 결국 동일성의 논리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체화된 조직이나 기구를 선택하는 자유보다는 오히려 블랑쇼(M. Blanchot)가 ‘공동체 없는 공동체’라 말했던 나와 타자의 비어있는 공동의 영역이 필요하다. 이비가 ‘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 동생, 당신, 그리고 나. 우리 모두’라고 말한 브이의 정체야말로 그러한 공동체일 것이다.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