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일은 외로운 일이다 본사 사장 ssnam48@kjdaily.com

2016년 02월 24일(수) 19:14

지난해 9월 일본 국회에서 벌어진 진풍경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의 집단 자위권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을 끄는 모습이었다. 배우 출신 야마모토 다로 의원은 표결때 투표함이 있는 단상까지 극단적으로 천천히 걷는 우보전술을 썼다. 느릿느릿 걸어간 다음 ‘민주주의 사망’‘자민당은 죽었다’는 내용의 퍼포먼스로 의원석을 향해 염주를 손에 든 채 참배하는 포즈를 취했다. 퍽 인상적이었다.

2013년 미국에서는 크루즈 상원의원은 동화책을 읽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안을 저지하기 위해 21시간 넘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발언을 하다가 중간에 할 말이 떨어지자 동화책을 꺼내 들고 읽었다.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방해행위)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필리버스터가 진행중이다. 필리버스터가 법제화된 2012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 국민은 텔레비전을 통해 필리버스터를 경험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 진행중인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한 것으로 23일 첫 주자로 나선 김광진 의원이 5시간 35분 동안 발언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을 깼다. 이어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4일 오전 2시 30분에 시작해서 오후 12시 48분경에 끝내 10시간 18분 가까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은의원은 한국 최장 필리버스터였던 10시간 15분 기록을 경신했다. 이어 더민주 유승희, 최민희, 강기정, 김경협 의원 등이 발언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108명의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해놓은 상태다. 정의당도 박원석 의원에 이어 김제남, 서기호 의원이 발언을 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은 법안의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데 새누리당이 합의하지 않을 경우 회기가 끝나는 3월 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필리버스터는 의사진행을 고의로 방해하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합법 행위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한 서구 국가들에선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종종 이뤄진다. 필리버스터는 16세기의 ‘해적 사략선(私掠船)’ 또는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서인도의 스페인 식민지와 함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1854년 미국 상원에서 캔자스, 네브래스카 주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막기 위해 반대파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부터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장시간 연설, 규칙발언 연발, 의사진행 또는 신상발언 남발, 요식 및 형식적 절차의 철저한 이행, 각종 동의안과 수정안의 연속적인 제의, 출석 거부, 총퇴장 등의 방법이 이에 해당된다.

외국의 경우 필리버스터를 통해 문제가 있는 법을 잘 저지한 사례가 많다. 미국의 경우 낙태 관련 법안을 저지해낸 것도 유명한 일화다. 의회 특별회기 마지막 날 공화당은 임신 20주 이후 낙태 금지, 낙태 유도제 제한, 외과 병원에서만 낙태수술, 병원시설 개선 의무화 등의 법안을 처리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해 11시간 동안 연설을 진행한 것이다. 미국 민주당 예비 대선후보 주자인 버니 샌더스도 지난 2012년 부자 감세에 반대하기 위해 8시간 37분간 필리버스터를 이어간 적이 있다. 당시 샌더스의 나이는 69세였다. 부자감세에 대한 반대의견을 9시간 가까이 연설한 샌더스는 연단에서 내려와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의 필리버스터는 부자감세법을 폐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자 그러면, 47년 만에 부활한 우리 야당의 필리버스터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야당은 왜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가.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테러방지법이 국정원에 무소불위 권력을 쥐어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민주는 테러방지법에서 국정원에 정보수집을 근거로 정보수집권 외에 추적권과 조사권까지 행사할 수 있도록 한 테러방지법 9조 4항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 조항으로 국정원의 권한이 너무 넓어지고 그로 인해 인권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러방지법이 국가정보원에 과도한 권한을 집중하는 것이라는 야권의 지적에 대한 정부 여당의 답변은 인권보호를 위한 충분한 제동장치가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야당의 필리버스터 발동은 원색적인 몸싸움보다 낫다. 거수로 결론을 내는 다수결이 숙의를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사실이나 필리버스터와 같은 수단을 소수파에게 쥐어주는 것도 민주주의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의회를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면 좋다. 더군다나 국민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의 장단점을 잘 알게 됐으니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필자는 현재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필리버스터 전술은 명분 있다고 본다. 현재의 법령으로도 테러 방지를 하지 못할 것 아니고, 오히려 있는 조직마저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니, 야당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며 릴레이 밤샘 토론을 이어가는 것은 새로운 정치모델이다. 자신들의 체력을 축내며 몸을 던지는 모습에 국민은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바로 이런 게 새정치다.

영화 ‘미스터 스미스, 워싱톤에 가다’라는 작품에도 필리버스터가 나온다. 이 영화는 거대 정당이 키운 서민후보 ‘스미스’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행하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스미스는 ‘의로운 일은 외로운 일이군요’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의로운 일은 늘 외롭다. 한국의 필리버스터!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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