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도시를 담은 보물상자 [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 <1> 센느 강의 ‘부키니스트’ 길 위에서 만나는 오래된 기억들, 오늘을 사는 지혜로 서적으로 만나는 과거와 현재…2011년 세계 유산 등재 아날로그적 삶속 내재된 공존의 미학 ‘문화의 힘’으로…

2016년 04월 20일(수) 18:36

지난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프랑스 파리 센느 강변의 부키니스트 풍경. 오늘날 이곳은 파리 경관의 일부가 됐으며, 파리지앵들의 소소한 일상의 풍경 그 자체이다.

이영미 ▶2004. 전남대 건축공학박사 ▶2005-2007 전남대 post-doc/청주대 post-doc ▶2009-2011. 전남대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4-현재. Paris 8대학, 도시계획 박사과정

한국의 도시 공간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 글은 스펙터클화 돼가는 도시공간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된다. 파리는 그 자체가 역사이고 예술이며 문화 컨텐츠의 집합체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가치가 공존하는 파리의 다양한 도시공간-뮤지엄, 벼룩시장, 무덤, 골목길, 센느강변, 파리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 등을 산보하면서, 그 길 위에서 만난 단상을 통해 그들의 문화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탐색한다. 그리고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서 광주가 직면한 ‘문화’라는 거대 담론에 조그마한 지혜를 보태기를 희망한다. 광주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지켜야할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는 하지 않길 바라며,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 날마다 축제인 파리로 떠나보겠다.

역사적으로 도시는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달했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도 큰 강을 중심으로 시작됐고 세계적으로 발달한 도시들 대부분은 강을 끼고 있다. 과거 하천이 치수와 교통, 식량 제공이라는 기능 위주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현대에 와서는 문화도시 성장의 동력으로 그 역할이 확대됐다. 오늘날, 국내뿐 아니라 해외 많은 도시는 하천 주변을 재정비하면서 새로운 문화산업을 유치하거나 수변 주거 공간, 여가 및 휴식 공간으로 조성하는 등 도심을 재정비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파리 센느강을 걷다 보면 다른 도시의 강변에서 볼 수 있는 문화와 차별화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도시가 하천 주변을 여가 및 휴식이나 유흥 공간으로만 활용하고 있다면 센느 강변은 이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등의 예술이 함께 있는 공간이다. 우리의 한강에 비하면 강폭도 좁고 동네 하천과 같은 규모와 더러운 수질에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센느강변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펼쳐 보여준다. 이곳을 산책하다 보면, 파리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자취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중 다른 도시에 비해 더 특별한 것은 바로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서점’, ‘세상에서 가장 큰 야외 서점’, 바로 ‘부키니스트(Bouquinistes)’이다.

2016년 2월 파리시 집계에 따르면, 센느강변의 우완에는 퐁 마리(pont marie)에서부터 미테랑 강변까지, 좌완은 투흐넬(quai de la Tournelle)에서부터 볼테르(quai Voltaire)까지 약 3㎞에 걸쳐 240여 개의 부키니스트가 있으며, 약 1000개의 초록색 상자와 30만 점의 고서 및 현대서적이 있다. 초록색 상자-가판에는 희귀한 고서적, 현대서적, 그림엽서, 기념품, 오래된 사진, 고지도, 오래된 신문, 잡지 등이 진열돼 있다. 악천후를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 11시30분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열려 있다.

부키니스트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15세기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책 판매상들이 생겨나고 더불어 반환되는 중고 책을 노점에서 판매하는 상인들 또한 증가했다. 당시에 이것은 불법적인 것으로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다. 부키니스트(Bouquinistes)는 프랑스 혁명과 함께 진화했고 1789년에 프랑스 사전에 등재됐다. 본래 부껭(bouquin, 고서적)에서 파생된 언어로 사전적 의미로는 고본 장수를 뜻한다. 현재는 센느강변 고서적 등의 판매가 이루어지는 초록색 상자(가판)가 있는 노천 서점을 모두 부키니스트로 칭한다. 1859년 파리시청은 노점상인들에게 특정 영역에 상자를 설치하고 책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는 이미 센느강변의 부키니스트가 200여 곳에 달했다. 1930년에는 고서적을 진열하는 초록색 상자를 규격화했으며, 2011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부키니스트에 진열된 오래된 서적들. 이곳은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심속 벼룩시장이다.

부키니스트는 파리시에 신청서를 작성해서 허가를 받은 후 영업을 할 수 있으며, 일주일에 5번은 서점을 열어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닫혀 있는 초록색 상자가 많은 날도 있으며, 어느 날은 운 좋게 대부분의 부키니스트가 열려 있는 날도 있다. 파리에서 처음 부키니스트의 초록색 상자를 본 순간 나는 ‘보물섬’을 떠올렸다. 한때는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희귀한 서적, 그림들을 찾았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비록 모방본이더라도 잘 고르면 수준 높은 그림들도 얻을 수 있다. 간혹 귀한 전공 책들도 싸게 구할 수 있는 횡재를 만날 수 있다. 산책하는 이들에게 이곳은 야외 전시장이자 벼룩시장이며, 도시를 담은 보물상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부키니스트는 파리 경관의 일부가 됐으며, 파리지엥들에게는 일상의 풍경이 됐다.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고서적들을 판매하는 야외 서점! 더군다나 모사본일지라도 파리의 오래된 풍경 사진, 고서적 등이 진열된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어떠한지 생각해봤다.

한국의 가판에서 조선 시대 혹은 근대기의 그림이나 책, 고지도, 민화, 음반 등을 판매하는 곳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직접 전문 서점을 찾아가야 하거나 특정 관광지에서만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이 쉽지 않다면, 센느 강변에서는 파리의 과거 자료들을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다. 비록 부키니스트도 관광객들을 겨냥해서 기념품 및 상업적인 자료 등을 판매하고 있지만, 대부분 파리의 오래된 자료들을 통해, 역사나 문화를 기억하고 이를 쉽게 소비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문화적 접근성이 용이하다. 문화가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프랑스인들은 더 많은 책을 읽는다. 처음 파리에 온 사람들은 파리 지하철을 타면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들보다 책을 읽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젊은이들부터 할아버지까지 책을 읽는 연령의 다양성에 또 한 번 놀란다.

내 프랑스인 친구, 비록 60세이지만, 자크는 이 지역에 있던 서점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는 내가 아마존에서 책을 주문하는 것도 질책한다. 그는 “아마존이 실체가 있는 곳인가? 그곳은 허상이다.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질감,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어떻게 그런 곳에서 책을 주문할 수가 있는가? 당장 서점으로 가서 책장을 넘겨봐라”면서, 실체가 없는 곳에서 책을 사는 행위를 혐오한다. 그의 말이 맞다. ‘그래, 다음엔 책 냄새를 맡으며 주문하리라’ 결심해본다. 그런데 돌아서면 원클릭으로 집까지 배송해주는 아마존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는 나를 발견한다. 나 스스로 편리함의 노예로 종속되고 만 현실에 좌절하곤 한다.

자크와 같은 이들이 프랑스에는 많아서 그런 걸까? 여전히 책 읽는 사람이 많은 프랑스 사회에서 부키니스트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파리를 상징하는 풍경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디지털로 사회로 변화한 현대에서도 책 냄새를 포기 할 수 없어 직접 만지고 보고 느끼길 원하는 프랑스인들의 아날로그적인 삶의 태도에서 형성된 힘이 지켜온 도시의 풍경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노천 서점, 부키니스트! 그들의 힘이 부디 오랫동안 이 도시에서 지속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