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고민과 창작, 디자이너가 누리는 최대 행복이죠” 인/터/뷰 미국에서 활동 중인 정시경 그래픽디자이너 광주 출신…대학재학 시절 美 유학길 올라 ‘클로락스’ 디자인팀에 한국인 최초로 입사 온·오프라인서 홍보…디자이너 입지 다져 정겨울 기자 jwinter@kjdaily.com

2016년 07월 25일(월) 19:55

섀도우 맥주 주제는 ‘블랙 매직(black magic)’으로 정하고, ` 관련된 심볼들과 로고를 형상화 시켰다. 각각 다른 성격을 지닌 심볼로 각 맥주의 맛을 다르게 표현하기도 했다.

‘선진국에 대한 동경’을 일컫는 말을 떠올리면, 세계 어느 곳보다도 먼저 ‘아메리칸드림’이 떠오른다. 하지만 어떤 경험이나 준비도 없는 한국인에게 ‘아메리칸드림’이 찾아오기란 예상처럼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에게 미국 생활을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혹자는 미국에서의 생활이 인생 최대의 고통이자 악몽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당당히 미국 무대에서 자리를 잡고 한국인 출신 그래픽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20대 여성이 있다. 바로 광주 출신 정시경(27·Zoey Chung·사진)씨다.

예향 광주인의 피가 흘러서일까. 미국 샘스클럽의 풀드포크&치킨 상품인 ‘KC 마스터피스(masterpiece)’ 현지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미국 전역에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그런 그를 최근 만나봤다.

지금은 디자이너, 작가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럽지만 사실 정씨는 미술·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다. 2007년에 광주여고를 졸업한 이후 아주대 미디어학부를 다녔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당시 그래픽 디자인, 3d 애니메이션, 컴퓨터 프로그래밍, 영상 등 컴퓨터 관련 여러 공부를 했었어요. 그러던 중 아주대 3학년 당시 휴학을 하고 아무 준비 없이 미국으로 떠났어요. 중학생이었던 동생이 미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죠. 딱히 계획은 없었지만, 미국에 가선 제 스스로 ‘그래픽디자이너’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아요. 제 손으로 직접 디자인 제품을 만들어 보고 싶기도 했고, 대학 때 배웠던 전공을 살리고도 싶었거든요. 미술을 전공한 다른 친구들처럼 그림을 집중해서 그려본 적도 없었지만요.”

KC 마스터피스 클로락스(Clorox) 인턴 당시 냉장식품 디자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BBQ의 본 고장 캔자스 시티에 근원을 둔 브랜드의 특성을 살려 디자인했다.

그는 대학 시절 2014광주비엔날레 ‘터전을 불태우라’전에서 디자인 부서 인턴 생활도 거쳤다. 그러나 미술을 배워본 적도 없었던 정씨에게 ‘디자이너’란 직함을 얻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 전 그는 데생, 크로키 등 기본적인 미술 소양을 갖추기 위해 개인적으로 미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의사소통이었다. 한참 전부터 유학 준비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갑작스레 미국으로 넘어오게 된 터라 영어 공부가 부족했다. 해서 그는 미국에 들어온 이후 1년 정도는 영어와 미술 공부에 매진했다.

이후 2012년 여름, 정씨는 샌프란시스코 AAU(Academy of Art University)에 입학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미술 전공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AAU는 미국을 대표하는 사립 디자인 대학교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미술 전공자들이 다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정씨는 ‘꼭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초·중·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미술을 공부해왔던 친구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플로워터 물병 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고있는 시기에 걸맞게, 플라스틱 물병이 아닌 완벽히 재활용되는종이로 만들어진 패키지를 고안했다.

“한국의 기말고사와 마찬가지로, 미국 대학교에선 학기 파이널(final) 시험을 치릅니다. 몇날 며칠 밤을 새며 파이널을 준비했던 기억이 있어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르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죠. 파이널 기간이 찾아올 때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게 작업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체력적,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어요.”

그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대학 시절 디자인했던 흑맥주 ‘섀도우(shadow)’, 재생 용지를 사용한 패키지 ‘플로워터(flowater)’ 등의 작품들은 여러 디자인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매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 대표 가정용품업체인 ‘클로락스(Clorox)’ 디자인팀 인턴에 덜컥 합격한 것이다. 시민권자들을 제치고 유일한 외국인이자 동양인이었던 정씨가 선발됐다. 하지만 당장 정씨에게 주어진 근무조건은 ‘무급인턴’. 부모님께 매달 생활비를 받아쓰는 유학생에게 무급인턴 생활을 선택하기란 참 막막한 일이었다.

서커스 보드게임 보드게임의 주제는 ‘서커스’로, 게임의 주요 사용층을 아이들로 정하고, 발랄한 일러스트레이션과 밝은 색감의 컬러로 게임보드를 완성시켰다.

“저에게 찾아온 행운이기도 했지만 일단 부모님께 정말 죄송했어요. 한참 고민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저에게 좋은 경험 삼아 한 번 일을 해 보라고 권해주셨죠. 그래서 무급이지만 그렇게 인턴 생활을 시작했어요.”

노력하는 사람에게 찾아온 행운이었을까. 정씨의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본 회사 측에서 무급 근무가 아닌, 그에게 일정 급여를 제공키로 계획을 바꾼 것. 그렇게 시간당 20달러를 받고 시작을 한 것이 어느덧 인턴 기간이 끝났고, 1년이 된 지금 정씨는 정규직 채용이 돼 일하고 있다.

회사 업무 이외에도 정씨는 대학생 때의 경험을 살려 미국 곳곳 디자인 공모에 지원했고, 온라인과 각종 사이트에 정씨의 작품이 내걸리기도 했다.

“공들여 완성한 작품을 봤을 때 오는 뿌듯함과 보람이 정말 큰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제 작업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줬을 때 가장 기쁘죠. 인종·성별·국적도 모두 다르지만 시각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자체가 정말 뿌듯해요. 그 행복감이 정말 저에겐 엄청난 긍정적 작용을 한답니다.”

한국인 그래픽디자이너로서 미국 현지에서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정씨는 미래 포부도 밝혔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가 세부 분야도 다양하고, 항상 끊임없이 트렌드를 읽고 공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요. 저 또한 늘 창의적이고 깨어있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써 발전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아트 디렉터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정겨울 기자 jwinter@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