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럼 공간이 문화예술창작소 실험적 영토가 되다” [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 <8> 파리의 복합문화예술공간 |
| 2016년 08월 11일(목) 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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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버려진 공간의 재생을 통해 예술가와 지역 주민들의 활동 거점으로 활용하는 역사가 오래됐다. 파리 북쪽 19구에 위치한 ‘르 쌍꺄트르(Le 104)’는 그 대표적 사례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파리는 20개의 구로 나눠져 있으며, 그 중 19구는 다른 구역보다 주거환경이 열악하고 실업자와 청소년 보호소가 가장 많은 빈민층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슬럼화된 지역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도심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Le 104’는 1873년에 지어진 시립장례식장을 개조해 2008년에 복합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재탄생했다.
‘Le 104’는 전 세계의 대중과 예술가들의 거주, 생산, 유통의 공간이고 예술적 협업의 플랫폼을 추구하며, 파리에서 처음 생긴 ‘종합예술 창작소’로서 혁신과 독특한 실험적 영토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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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유엔이 집계한 세계의 도시화 비율 54%. 세계 도시인구는 1950년 7억4천600만 명에서 현재 39억 명까지 증가했고, 2050년경에는 전 세계 인구의 약 70%가 도시에 거주하게 될 것으로 본다.
우리가 열망하는 도시의 화려함 뒤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바로 슬럼(slum)이다. 그곳에서 사는 거주자 대부분 불법 이민자, 극빈층, 실직자들이며, 도시화에 의해 필연적으로 태어난 슬럼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늘 함께 공존해왔다.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슬럼은 도시 인근이나 도심지에 형성되는데, 그 이유는 슬럼의 거주자들이 도시의 일원으로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마이크 데이비스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과잉 도시화의 추동력은 빈곤 재생산이지 일자리 공급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21세기의 도시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싸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도시일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예측했다. 도시 성장이 제공하는 기회의 장이 많아질수록 이에 비례해 짙어지는 그늘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전 세계 도시 인구의 ⅓인 12억명이 거주하는 슬럼이 도시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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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은 가장 궁핍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하고, 세상은 그들이 사는 공간을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도시화의 필연적 결과로 탄생한 슬럼을 부정하는 것은 도시의 성장 메커니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슬럼의 강제 철거 및 이주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거주자들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것이 된다.
이와 다른 또 다른 해결책으로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명목하에 슬럼의 재개발이 자행된다. 많은 도시에서 이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위생시설과 도로정비, 조명증설, 하수처리시설 등 인프라스트럭처를 개선함으로써 정주환경을 향상시키려는 재개발 시도가 이뤄져왔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 환경만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는 이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재개발된 환경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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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 그들의 삶에 활력을 주며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향해 그곳으로 들어간 공간과 사람들이 있다. 슬럼이 도시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얼굴이고 동전의 양면과 같다면, 이제 우리는 그곳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파리 19구의 ‘Le 104’는 지역의 특성을 존중하고 공동체가 어우러져 살기 위한 해결책으로 도모된 재생사업이다.
파리시는 1997년 장례식장이 폐쇄된 이후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한채 버려져 있던 이곳을 철거하지 않고, 그곳의 역사성과 맥락을 보존하는 건물의 재생을 선택했다. 오베르빌리 거리(Rue d’Aubervilliers) 104번지와 큐리알(Curial) 거리 5번지에 있는 ‘Le 104’의 숫자 104는 바로 번지수를 의미한다. 19구의 거주자들은 파리 내에서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이며, 평균 실업률보다 높아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 상대적으로 개발이 뒤처져 있는 이 지역은 문화예술 관련 시설, 오락, 여흥을 위한 장소가 매우 부족할 수밖에 없다. 슬럼화된 이 지역에 자리를 잡은 ‘Le 104’는 명칭에서 재개발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지역주민과 함께 호흡하고 문화공동체로서 공존’하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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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104’는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두 개의 큐리알 홀(Curial hall), 오베르빌리에 홀(Aubervillier hall)(면해 있는 도로명을 따라 명칭)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무실, 아마추어들을 위한 공간, 문화기업양성소, 아동을 위한 공간, 전시실, 아뜰리에, 서점, 상업공간(레스토랑, 카페, 중고판매매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 꼬마들의 집(La maison des petits)
: 작가 마타이 크라셋(Matai Crasset)이 디자인한 ‘꼬마들의 집’은 0세부터 5세까지 아이들과 부모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예술적 창의성 발달공간으로서 놀이와 예술을 통해 듣기, 말하기, 사교,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푸른 집(maisons verts)’이라는 프로그램은 전문가들의 지원하에 다양한 국적 및 다문화 가정들이 서로 다른 문화 교환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배울 수 있다.
▶ 104 문화기업양성소(L‘incubateur 104 factory)
: ‘창조’와 ‘혁신’을 신조로 예술, 산업, 문화, 창조 분야의 협업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이다. 문화와 산업간 협업과 혁신이 예술의 경제적 기반을 위한 전략의 주요한 축으로 보고 예술이 경제적 가치를 갖춰 자립할 수 있고 시장에 융화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예술, 미디어, 건축, 도시,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신규 업체들이 지원을 통해 6개월에서 최대 2년까지 입주할 수 있으며, 이 기간에 문화, 예술에 필요한 기술들을 현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고 영역 간의 협업을 통한 정보를 교류하며 수시로 기술 아이템을 논의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
▶ 아마추어센터(L’art amateur au Cinq)
: Le 104 공간 중, 큐리얼 5번지 거리에 면해 있는 곳에 있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공간이다. 16세 이상의 18구, 19구의 지역 거주자 및 단체에 제공된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무료 프랑스어 교육, 캘리그래피 아뜰리에, 인도의 전통무술(칼라리) 실습장, 미술 교육 아뜰리에, 주부들을 위한 연극 아뜰리에 등이 개설돼 있다. ‘르 쌍끄(Le Cinq)’는 매년 30에서 40개 그룹과 2만500명 이상이 아뜰리에를 신청하며 일반 시민들은 시간당 2유로만 내면 강좌를 배우거나 이곳의 연습장소와 설비를 대여할 수 있다.
▶ 큐리알 홀(Curial hall)·오베르빌리에 홀(Aubervillier hall)
: 일반인들에게 매일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상시 열려있는 개방공간으로서, 힙합, 브레이크댄스, 요가, 재즈 등 각종 댄스, 스포츠, 음악 연습과 자유로운 전시 등이 이뤄진다. 주민들이 피크닉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는 이 홀은 대중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핵심 공간이다. 방황하던 청소년들이 그들의 끼를 발산하고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이곳으로 유도, 이곳은 점차 19구에 거주하는 청소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청소년들도 즐기기 위해 찾는 공간이 됐다.
■ 창작의 주체는 작가가 아닌 대중
‘Le 104’는 탈장르적 예술과 대중을 만나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조형, 음악, 무용, 연극, 비디오, 디자인, 영화, 문학 등 장르를 초월하는 예술이 각자의 작업 기반 아뜰리에를 기반으로 전시, 상영, 판매, 축제 등 다양한 문화적 이벤트로 실현된다.
초기 디렉터인 프레데힉 피스바크(Frederic Fisbach)와 호베흐 깡따헬라(Robert Cantarella)는 각각 공연과 연극 연출을 담당했던 민간 전문가들이다. “깡따헬라: [.중략…]오래전부터 표현, 재현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해 고민해왔다. 우리가 그동안 사고와 경험을 통해 이해한 것은 작업과 연구를 하는 순간 역시, 대중과 만나는 전시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스바크: 어렵게 수량화되거나 형용되는 창작의 과정은 세상을 재현하기 위해 가지는 발아와 양식의 변화에 필요한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Artpress, n°342, 2008.02월)
창작의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어떻게 대중과 예술이 서로 격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할까?’ 그리고 ‘문화나 예술은 계속 생산돼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로 확장된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등지고 작업 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결해나가는 장소로서 예술의 창작과 생산, 주민들과의 호흡이 가능한 ‘Le 104’를 꿈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야심찬 출발은 실패라는 불명예를 안고 좌절되고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2010년 조세 마뉴엘 곤잘레스가 새롭게 디렉터로 임명되면서 재정비됐다. 그는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활발히 유치하고 이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새로운 운영방식을 모색해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변화 중 가장 큰 것은 창작의 주체를 작가가 아닌 대중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Le 104’는 예술을 가까이 하기 어려운 낙후 지역에 전략적으로 조성됐으며, 출발부터 어려움을 안고 기획된 곳이다. ‘Le 104’이 설립될 당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소는 예술가 개개인의 창작활동 지원이 목적이 아니라 공간을 이용하는 주민들에 대한 서비스로서 예술문화 플랫폼을 설계했다는 점에서 기존 다른 문화예술창작소들과 차별화된다.
이곳은 조성되기 전부터 사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주민들을 예술의 현장으로 끌어들여 참여시키고 창작공간의 주인이 주민들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선행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탈장르의 예술 융합 실험과 창작, 산업, 연구 단체들이 협업해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주민이 창작의 전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과정으로서의 예술’의 탄생을 경험했다. 아울러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끌어내 슬럼화된 지역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한동안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초기의 실패를 딛고 이제 ‘Le 104’는 지역 주민들이 함께 하는 ‘문화공동체’를 진정으로 실현하고 있는 창작소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확산된 정부의 창조도시 담론의 영향을 받아 여러 지자치체들이 유휴공간, 폐교, 폐산업시설 등을 재활용하면서 도시재생의 가치를 내세우며 예술창작스튜디오를 조성했고 레지던시 또한 작가의 창작 전용공간이 아니라 지역 및 도시 재생과 지역 주민에 대한 문화향유 기회 제공과 참여를 위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개인의 창작 열망과 성과 위주의 지역사회와의 연계 과제는 중재 되지 못한 채 갈등을 일으켰고, 그 모호한 경계와 더불어 미숙한 운영체계 혹은 지나친 관의 간섭으로 인해 긍정적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곳이 많다. 다양한 계층 간의 합의되지 못한 물리적 재생이 그 지역의 가치까지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Le 104’는 시설 관리 및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연간 1천100만-1천200만 유로의 예산이 지원되고 나머지는 30여개의 기업 및 후원과 자체 예산으로 충당한다.
또한, 해마다 30-35개의 프로그램이 미리 기획되고 6개월에서 24개월의 중장기 프로그램들이 계획되는 등 체계적인 운영과 재원 조달을 통해 성공적으로 지역사회의 문화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전시장, 공연장, 창작공간 등의 단순 기능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예술의 다양한 장르가 융합되며 이곳만의 독특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다시 예술의 영감의 원천이 되며 ‘문화예술창작소’의 실험적 영토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