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을 기다리며 권명숙의 인문학 산책 전남대 중어중문학과 외래교수 |
| 2016년 08월 25일(목) 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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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에 둘째아이를 출산했는데 무더위에 입맛을 잃어 어머니께서 끓여다 주시는 미역국을 몰래 쏟아버리곤 했다. 그러다보니 젖은 나오지 않고 아이는 보채는데 집 안팎은 가마솥처럼 달아올랐다. 긴긴 여름날의 태양을 원망하면서 두 아이와 함께 남편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렸던 그 더웠던 날들의 기억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올 여름에 아이를 출산한 모든 산모들에게 진심어린 응원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숲 속 등산로의 반쯤을 차지해버렸던 무성한 풀들이 조금씩 마른 기운을 드러내며 꺾이고 있다. 나뭇가지에서 고성을 뽑아대는 매미의 합창 중에도 가을 풀벌레들의 부드러운 선율이 불쑥불쑥 끼어들고 있음도 느낀다. 자연의 어김없는 이 질서를 믿기에 우리는 불을 뿜는 용을 타고 남방하늘을 불태웠던 여름의 신, 축융(祝融)의 폭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가 휘두르는 불꽃깃발의 여운으로 인해 천지가 좀체 식고 있지는 않지만 그 열기 속에서도 가을의 신, 욕수(辱收)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음을 믿는다.
사계절의 운행은 우리에게 큰 스승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전통시대 지식인들은 자연을 그저 자연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을 통해 세상사의 이치를 읽어내고 자신을 수양하였다. 이제 시원하게 불어올 가을바람을 기다리면서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초동린(招東鄰)’이라는 시 한 수를 감상해보자
작은 통에 술 두되 담고 (小榼二升酒)
여섯 자 평상에 새 돗자리 깔아두었네. (新簟六尺牀)
저녁에 담소나 나누게 오시게 (能來夜話否)
연못가에 시원한 가을기운이 들려하지 않은가? (池畔欲秋凉)
여름의 끝자락에 가을 기운이 느껴지자 시인은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을 초대한다. 짐짓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청하고 있지만 연못가 새 돗자리에 앉아 지인과 도란도란 일상사를 얘기하며 한 잔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히 묻어나고 있다. 백거이는 술과 가을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백거이의 자(字)는 낙천(樂天)인데 천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편안하게 살고 싶어 했던 그의 마음이 이름과 자에서도 느껴진다. 그리하여 그는 되도록이면 쉬운 시를 쓰고 싶어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면 글자를 모르는 늙은 하인에게 읽어주어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시를 고쳤다고 전해진다.
여름날의 폭염보다 때로는 정치 지도자의 아집이 국민을 더 번열증 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사납다(苛政猛於虎)’라는 공자의 탄식도 그런 경우를 당해 나온 말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기를 염원하며 산천이 오색으로 물들어갈 그 가을을 기다린다.
/전남대 중어중문학과 외래교수
전남대 중어중문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