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력이 멈춰버린 도시의 문화 혁명 [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 파리의 복합문화예술공간 (3) |
| 2016년 10월 13일(목)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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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좌우를 관통하는 센느강의 오른쪽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오래된 건물들로 둘러싸인 19세기의 로맨틱한 파리의 도시풍경이 아닌 조금은 낯선 풍경을 만나게 된다.
과거 산업시설이 밀집돼 있던 지역으로 공장에서 뿜어나오는 뿌연 연기, 낡은 건물들과 버려진 창고들이 낯선 스카이라인을 형성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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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기술, 법률, 부동산 및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와 도시설계 건축가로 구성돼 있는 세마파는 도시재생사업에 필요한 건축사 및 건설회사를 선정하고 부동산 시장 매매를 위한 행정과 재정 전반의 일을 기획한다.
세마파는 1990년대부터 도시재생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새로운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파리 리브 고슈(Paris Rive-Gauche)의 재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을 통해 신규주택과 사무실, 공공시설(탁아소 및 학교) 및 상업시설, 예술가촌과 더불어 건축대학교, 이날코 대학(Inalco)과 파리7대학의 새로운 캠퍼스 조성을 계획했다.
이 신시가지는 주로 버려진 건물들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조성됐으며 실제로 파리7대학의 그랑 물랭은(Grands Moulins)은 방앗간을 개조했고 알 오 파린(Halle aux Farines)은 밀가루 제분공장을 리모델링해 대학 캠퍼스로 재활용한 것으로 건물에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표기했다.
오랜 건물들을 중심으로 연계 건물과 신축 건물을 지어 파리 시내에서 보기 힘든 큰 규모의 대학 캠퍼스를 조성했다. 1891년 세워진 압축기 공장(Usine d’air comprime)에는 파리 발 드 센 국립건축학교(L’ecole nationale superieure d’architecture de Paris-Val de Seine)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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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의 가동이 멈춰버린 공장들, 그곳에서 뿜어나오던 연기가 사라질 때 그 건물은 더이상 존재 의미는 없다.
한때 이곳은 공장의 동력이 멈춘 이후 생명이 멈춰버린 듯 버려진 공간들로 가득 차 있던 도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파리의 또 다른 랜드마크를 형성하며 젊음과 학문, 예술적 열망이 꿈틀거리는 문화예술의 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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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시설물들을 예술가들의 창작터로 변화시킨 사례는 더 이상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낙후된 도시의 빈 공간을 동력으로 삼아 새로운 도시경관으로 태어난 파리의 리브 고슈, 이 지역에 창작예술공간 ‘레 프리고(les frigos)’가 자리 잡고 있다.
‘프리고’는 프랑스어로 냉장고, 냉동고라는 의미다. ‘레 프리고’는 세계대전 중인 1921년 건설돼 음식물 저장고로 쓰였던 곳이었으며 1945년 SNCF(프랑스 철도회사)의 소유가 돼 지속되다가 대규모 마트 등 경쟁시장이 증가하면서 70년대 초반에 문을 닫게 됐다.
빈 공간으로 변해버린 이곳에 화가나 음악가, 건축가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무단 점거를 지속하면서 창작활동을 이어나가 점차 예술가들의 레지던시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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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난이 극심했던 시절, 파리시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불법적으로 건물을 점거했다고 해 이들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후 1985년 건물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파리 동부 개발협회(APLD91), 임대인협회(L’Association des Locataires)라는 두 단체의 노력으로 철거를 막아내며 예술가들의 창작터전을 보호할 수 있었다. 현재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촌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3년 이후 파리시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스쾃(무단 점거)에 의해 무상으로 점유하고 있었으나 파리시에 임대료를 내기 시작하면서 6층에 이르는 공간에 200여 명의 예술가들이 합법적으로 거주하게 됐다.
앞서 연재했던 복합문화공간 중 하나인 ‘호베르네 집(Chez Robert)’은 예술가들이 무상으로 거주하면서 연중 무료로 시민에게 공간을 개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레 프리고’는 1년에 두 번 정도 열리는 개방일에만 아뜰리에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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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은 예술가들의 확장된 캔버스이며 내부공간의 벽, 계단실, 복도, 설비시설물, 우편함마저 모든 곳이 이들에게는 창조적인 실험적 놀이터이다.
현재 ‘레 프리고’에는 음악, 조각, 영상, 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모여 작업을 하며 매년 봄에 공동으로 전시와 행사, 교육 등을 기획한다.
이들의 창작을 위한 열정은 멈춰버린 음식물 저장창고였던 이 공간의 온도를 높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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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19구의 장례식장을 개조해 지역주민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공간으로 거듭난 ‘르 쌍캬트르(Le 104)’와 히볼리 가(Rue Rivoli)에 건물을 무단 점거해 예술가와 시민들의 친밀한 소통 창구가 된 ‘호베르네 집(Chez Robert)’처럼 프랑스에는 유휴공간을 재활용한 여러 형태의 문화예술 창작공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공간들은 주로 소외계층에게도 평등하게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프랑스의 문화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버려진 도시 공간들을 활용해 자치단체 주도하에 시설물의 용도가 변경된 곳이거나 예술가들이 이곳의 공간을 점유하면서 자생적으로 예술 창작공간을 형성하게 된 곳들이다.
‘르 쌍꺄트르’, ‘호베르네 집’, ‘레 프리고’는 도시 슬럼화를 겪고 있던 지역에 활기를 되찾아 주고 지역문화 활성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공간은 예술 창작촌의 성격을 갖게 되면서 예술가들이 이 장소에 대거 유입됐고 그들의 다양한 창작 활동은 시들어가는 도시공간에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했으며 숨을 쉬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문화교류가 일어나고 도시의 이미지는 개선됐으며 이를 통해 관광 효과가 발생하면서 결과적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성과까지 얻게 된 것이다.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보장받고 파리시는 경제적 효과를 얻으며 시민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문화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됨으로써 그들의 문화적 삶의 질은 향상됐다.
창작자와 이들의 예술활동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행정기관, 그리고 문화예술을 자연스럽게 향유하는 시민들. 이처럼 예술을 창조, 생산, 향유하는 유쾌한 메커니즘은 또 다른 예술 창조를 위한 미래의 동력이다.
한국에서도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이 전무했던 1990년대를 지나 창작공간 확보를 위한 자생적 노력과 행정지원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으며 짧은 시간 예술인들을 위한 레지던시를 비롯해 ‘창작환경’이 개선됐고 많은 관심 속에 양적 성장도 이뤄졌다.
그 근원에는 프랑스의 스쾃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도 스쾃을 시도한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열악했던 예술인들의 창작환경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이슈로 선점됐고 그 노력의 결실로 한국의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빈 공간을 예술을 위해 제공한다는 그럴싸한 포장 안에 예술가의 특성을 고려하기보다 그들을 단순히 공간의 관리자로 여기는 일선 행정기관과의 불편한 상하관계는 창작자와 관리자의 사이가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작과 생산, 향유의 조화로운 변주를 통해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유휴공간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활용한 도시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