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그랬습니까? 본사 사장 ssnam48@kjdaily.com

2016년 10월 19일(수) 20:10

2016년 대한민국을 가장 슬프게 한 단어는 뭘까. 필자는 ‘헬조선’이라고 생각한다. 헬은 열악한 노동시장 등 민생고를 지칭하는 것인데, 조선은 또 뭔가? 헬코리아가 아니라 왜 헬조선인가. 한국을 조선이라 부르는 것은 오늘의 현실이 태생에 의해서 지위가 결정되는 과거의 신분사회를 닮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담은 것이다.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고 공정한 경쟁에 의해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이 무너지고 있다는 반어법이다. ‘헬(Hell=지옥)조선’은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하고 핵심적인 문제, 부의 편중과 기회의 불공정이 구조화되고 고착화되어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대다수 국민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헬조선’이란 연애·결혼·출산·취업·주택·인간관계·희망까지 포기한 흙수저 청년층이 만들었지만, 최근에는 치열한 경쟁과 빚에 짓눌리고 고용불안과 주거불안에 시달리는 중장년층, 노년층까지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요즘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하다보면, ‘거봐요. 최순실 딸 정유라만 봐도 헬조선족은 살 수가 없어요’식 댓글이 많다. 최근에 터진 ‘최순실-정유라 사건’은 헬조선을 넘어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소설같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국민 눈에 들어온 ‘금수저 정유라 이화여대 특혜의혹’은 온 국민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한 독자가 필자에게 전화를 해 이렇게 물었다. ‘한 여학생을 입학시키기 위해 청와대, 이화여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승마협회, 대기업이 총출동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화여대가 금메달을 가져온 학생을 뽑으라고 하자 승마복에 금메달을 걸고 온 정유라가 실제 합격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승마협회가 독일까지 국가대표 감독을 보내 정유라를 일대일 개인 레슨했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최순실이라는 한 아줌마가 대기업에서 몇백억 돈을 모으고 거대한 대학을 움직이고 딸의 학점까지 손볼 수 있다는 게 정말인가요?’

국민들의 이런 궁금증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은 논평을 내고 국정조사와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 이화여대 교수들은 최경희 총장 사퇴 촉구 시위를 했고, 결국 19일 총장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사안이 중대하다고 느꼈는지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최순실씨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학·학점 특혜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지옥 같아서 조국을 떠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더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 희대의 사건이다. 지난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조사한 ‘경제활동인구조사를 활용한 청년실업률 분석결과’를 보면 체감 청년실업률은 22.5%나 된다. 취업난은 이미 치열한 대학 입시에서 예고된 일이다. 한국은 일단 명문대를 나오지 않으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없고, 이것이 삶의 질을 좌우하는 풍토가 오랫동안 정착돼 왔다. 현재 청년층의 이민문의는 부쩍 늘어난 상황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보통 중장년층의 투자이민 상담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 들어서는 20-30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순실딸 정유라 특혜 사건’은 입시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대학 입학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 무한경쟁에 내몰려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민낯에 뺨을 때린 격이다. 피로사회, 과로사회라 불릴 만큼 다들 열심히 사는데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우리 자화상에 먹칠을 한 격이다. 저출산, 사교육, 청소년 문제, 빈부격차, 계층의 세습구조, 부동산투기, 학연과 학벌문제, 사회병리학적인 제반 사회문제가 철저히 ‘대학’과 연동해 있는 우리 현실에서 보면, 이 사건은 정말 최악의 심적 고통을 준다. 지옥에서 살고 있는 ‘헬조선층’이 볼 때, 이 사건은 절망의 불에 기름을 부은, 정말 화가 나는 일이다. ‘정유라 특혜의혹’은 흙수저의 마음속에 지옥 유황불을 던져 더 아프게 살을 태우는 모양이다.

한 지인이 문자를 보냈다. ‘단풍이 아직 들지 않았는데 이 가을이 벌써 많이 아프다’ 그런데, ‘헬조선’이라며 이 지옥같은 삶에서 구출해달라고, 탈출 기회를 달라고 악쓰는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정치인은 어디 있나.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함의, 살아가는 매 순간이 아프다, 고통스럽다, 끔찍하다는 젊은이에게 천국의 파라다이스를 보여주며 잘따라오라고 손짓하는 리더는 정말 없다는 말인가.

지옥 다음은 무엇일까?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과연 없는가. 유황불 속에서 절규하며 소멸할 때까지 버티는 방법 외에는 정말 없는가. 편의점에서 알바하고 도서관에서 취업준비하는 한 청년에게 ‘조금만 기다려라’ 자신있게 얘기하는 정치인 누구 없는가. 누군가는 헬조선이라며 절망하더라도 행동하며 그것을 탈출하겠다고 취업준비, 인턴십, 비정규직 생계 활동,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는 이에게 ‘당신의 절규를 알고있다’고 위로하는 정치인 누구 없는가.

여러모로, 가지가지, 참, 아픈, 가을이다. 어떤 아줌마가 딸을 끔찍이 사랑하여 대학교와 교수를 매수한 다음, 딸이 하고싶은대로 다 해주다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뒤 자취를 감추었다? 이 해프닝은 너무나 끔찍한 가을영화다. 훗날 이 사건이 어떻게 각인될지 모르지만, 지금 받은 절망감은 깊은 흉터로 마음에 새겨질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다음 대통령이 꼭 해야 할 일은 자명해졌다. 불공정한 현실 개혁, 대물림을 방지하기 위한 평등정책, 강자에 의한 차별과 약탈방지, 경제민주화를 통한 합리적인 복지, 국민의 희망과 자존감 회복···.

/ss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