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발자국이 길이 되는 곳…초원에 살고 초원에 죽다 [화필여로] <105> ‘칭기스칸 후예들의 삶’…몽골 동물들에게 지혜를 배우다

2016년 11월 30일(수) 19:35

박종석 作 ‘청해르의 독수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시작과 끝을 잴 수 없는 몽고의 지평선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게르촌 캠프는 멀리서 보면 망망대해에 돛대 하나 떠있는 형상이다.

식당 게르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참새한마리가 들어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아! 저놈이 어떻게 들어왔지?’하고 의문을 갖는데 잠시 후 빵 조각을 물고 게르 지붕의 한 가운데에 있는 연통 틈새로 유유히 빠져 나간다.

참 영특한 새라 생각하면서, 생존의 방법과 생명유지에 충실한 미물도 별종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화산 분화구옆에서…

오후에 체크아웃하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 북쪽으로 240㎞를 이동하는데 습지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쳉하르에 도착한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노천온천욕을 만끽하고 기온이 낮은 다음날 새벽 4시쯤에 게르에서 나와 소변을 보는데 방귀가 크게 ‘뽕’하고 배출된다.

어두워서 보지 못했는데 옆에서 말이 풀을 뜯고 있다가 그 소리에 놀라 겁을 먹고 몇 걸음 뛰어 도망친다. 나도 동시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말은 안심하고 다시 풀을 뜯는다. 아마도 동물적 본능에 총소리로 오인했을 순간이다, 내가 말이 아니니 그 심정을 알 수 없으나 나는 혼자서 배꼽이 빠지듯 웃는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진다’는 고사성어가 떠오르는 시각이지만 싱그러운 새벽이 상쾌하도록 즐겁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생존에 대한 경계의 즉각적 반응은 당연한 본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는 체체록렉을 거쳐 아흐타미르를 경유해 통갈락타미스 캠프에 도착했다. 그리고 야채가 많은 몽고 전통 조리법인 돌로 구워 끓인 양고기로 식사를 하는데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 맛이 있었다.

‘촐로팅 협곡’

오후에는 근처에 있는 유목민 게르를 방문해서 전통술을 담는 과정을 지켜봤다. 두꺼운 양은 세숫대야가 예술품처럼 찌그러져 있는데 20년을 넘게 사용했고 앞으로도 몇 십 년은 더 사용할 수 있단다.

주인인 하탕바타르 영감님은 유목민 전통풍습으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데 술을 계속 따르기만 하고 무표정이다. 부인은 쉬지 않고 일하며 2시간 후 최종 증류주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따뜻한 증류주를 대접하는데 술의 도수는 낮지만 은은한 맛이다. 그래도 여러 잔을 마시니 취기가 오른다. 나는 속성으로 영감님과 그 분위기를 그림으로 그린다. 표정이 천사 부부 같은 선한 분들이다.

나는 무표정의 주인을 웃게 만들려고 온갖 애교를 떠는데 가장의 위엄을 잃지 않으신다. 파장 후 헤어지는데 나를 따로 불러 그 귀한 술 한 병을 담아 선물해 주신다. 그러면서 환하게 웃으신다.

지극정성에 유목민 노인의 관념을 무너뜨린 순간이다. 함께 인증샷도 찍고 보듬어 안고 헤어진다. 아마도 나와는 15세 정도 윗분이지만 그분들은 나를 30세 정도로 짐작해서 귀여운 재롱에 순간 마음의 빗장이 풀린 듯하다. 그 유목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서 물신주의에 물든‘문명인에게 행복이 무엇인가?’를 제시해준다.

그들은 안거낙업(安居樂業)으로 게르 천막 한 동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하는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다.

‘몽골 전통주 실습장’

주위는 강물이 흐르고 평지에 대형 암벽바위가 덩그러니 서 있는 독특한 지형으로 그 옆 초원에서 승마를 즐긴다.

말 다루기가 여간 힘든 줄 몰랐다. 호흡과 말의 뜻을 맞추지 않으면 말이 과객을 무시하듯 했다. 동물도 유치원생을 알아보는 듯 자기 뜻에 어긋나면 반항이 아닌 자유 의지대로 행동하는가 싶다.

목가적인 분위기가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 다음날 다시 북쪽으로 행진 하는데 촐로팅 협곡이 나온다.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흐르면서 반으로 갈라져 대협곡을 형성해 수십㎞가 도도히 강물을 흘려보낸다.

1시간 후 허룻꺼 화산지역에 도착해서 산 정상에 이르니 분화구가 입을 벌리듯 거대한 원형극장처럼 보인다. 900년 전, 2년 동안 화산폭발이 있었는데 100㎞까지 영향이 미쳐 협곡이 탄생했는데 현재는 사화산이다. 나는 독특한 지형을 화선지에 정신없이 옮겨 그린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짙은 황갈색 위에 일정부분 밀림을 보듯 했다.

잠시 후 하산해서 약 1시간 거리인 테르한차간 호수에 도착했는데 큰 호수가 무척 매력적이다. 비취색(翡翠色)을 닮은 호수는 흰색의 큰 호수라는 뜻으로 가마우지도 많고 이빨이 촘촘하게 박힌 식인 물고기도 많단다.

아주 먼 옛날에는 거대한 맘모스도 서식했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넉넉하고 한가로운 호수다. 떠나기가 아쉽지만 다음날 오후에 출발해서 9시간 소요되는 150㎞를 이동한다. 자르갈란트와 신이떼르 마을을 지나 달라이왕 캠프에 오후 8시쯤 도착한다.

숲과 계곡, 구릉을 수없이 오르고 내려가는데 양떼와 교배종 야크, 말, 염소를 만난다. 특히 초지에는 다람쥐가 많다. 메뚜기도 자주 만나는데 밤낮의 기온차를 극복하려고 껍질이 두꺼운 갑옷을 입은 듯하다. 환경에 적응력이 뛰어난 메뚜기는 날면서 따다닥 따다닥 소리를 내다가 땅에 안착하면 조용하다. 메뚜기가 우는 소리가 아니고 철 밥통처럼 강한 날개짓 하는 소리다.

조금 더 가니 수백 마리의 양떼가 운집해 풀을 뜯는다. 어느 지점에서 말을 탄 유목민을 만난다. 주름살이 많은 노인은 60대이고, 바로 옆 젊은이는 30대인데 자기 친동생이란다. 장애인으로 말을 못하는데 아들 같은 동생이다.

그 유목민의 손톱에 묵은 때와 투박한 손등은 고단한 삶의 연륜과 애환이 쌓인 모습이다. 그러나 환하게 웃는 표정만큼은 행복한 모습이다.

다시 출발하는데 콩만 한 우박이 10여분 쏟아진다. 앞산이 우박이 쌓여 설산으로 보이고 달라이왕 호수에 반영된 석양빛과 강변의 숲이 도열하듯 자연의 숭고미가 참으로 고요하다. 숲이 많은 계곡 옆에는 소똥이 손바닥만한 개떡처럼 놓여 있는데 그 앞에 에델바이스가 자태를 수줍게 드러내듯 군데군데 피어 있다.

나는 유럽에만 그 꽃이 있는 줄 알았는데 세계 도처에 분포돼 있다고 일행이 알려준다.

쉼터를 지나 분지사이를 지나는데 큰 독수리 떼 20여 마리가 양지바른 둔덕에 모여서 햇빛을 즐기고 있다. 무료할 때는 움직이는 동물만 봐도 지루함이 사라진다.

가다보니 몽고 최북단 도시인 무릉에 도착한다. 시내가 형성되고 대형마트도 있지만 뒷골목 풍경은 우리나라 1960년대 정도의 수준이다. 한낮 온도는 철판에 계란을 깨면 익을 정도 땡볕이다. 생필품을 사고 나는 그늘에 앉아 어린이들을 화폭에 담는다.

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엄마와 대화를 하다 보니 처녀시절 한국에 돈 벌러 갔단다. 귀국해서 이 도시에서는 중·상류층으로 잘 살고 있단다. 세계는 좁고 인연은 우연하게 이어지고 또 만나기도 한다.

도시를 벗어나 2시간 정도 나가다 보니 순록 7마리가 목줄에 묶여 사진촬영하고 주인이 돈을 받는다.

자연에서 의지대로 뛰고 풀을 뜯어야 되는데 운이 없어 사람들에게 잡혀 보상 없는 조연으로 전락한다. 숲 사이 도로로 짙푸른 호수와 선박 등 도열하듯 어느 작은 항구 어촌에 와 있는 느낌이다.

세계 담수의 1%를 보유하고 있는 샤머니즘의 보고(寶庫)인 홉스걸 호수다. 호수 빛깔이 맑고 대단히 아름다운 휴양지이지만 이 담수로 고비사막을 적셔준다면 황사현상을 막고 거대한 숲을 이룰 수 있겠다는 아쉬움만 남는다.

여행 종반에 해당되는 신성한 호숫가의 캠프는 독서와 함께 산책하기 좋은 공간이다. 며칠간의 여유로움이 신성한 호수를 닮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