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정치가 낳은 블랙리스트 남성숙 광주매일신문 사장 ssnam48@kjdaily.com

2017년 01월 11일(수) 20:09

오랜만에 택시를 탔다. 최순실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를 생중계로 보던 운전사가 대뜸 말을 걸었다. “아들 하나 있는데, 불쌍해요. 정유라가 그랬잖아요.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이 세상에 돈 많은 부모만나는 실력이 어딨어. 그건 신의 영역이지~. 우리같은 서민부모 둔 자식들을 참 슬프게 한 말 아니야?”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이 있어~. 아들이 예술을 하는데, 블랙리스트인가 뭔가에 이름이 올랐데, 이 정부 들어 되는 일이 없다고 한 숨 푹푹 쉬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더라고~” “블랙리스튼가 뭔가는 감시가 필요한 위험한 인물, 감시명단 아닌가? 우리 아들 참 순해요. 고집 때문에 돈버는 일도, 부모에게 손벌리는 짓 못하지만, 정부에 대고 나쁜 말 할 애가 아닌데, 왜 그 명단에 올랐을까~”

남의 얘기 같던 블랙리스트 얘기를 듣고나니까, 많은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할 때 필자는, 내심 많은 기대를 했다. 제 아무리 광주에다 펼치는 사업이래도, 단군 이래 최대 문화프로젝트라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은 국책사업이므로 국가가 최소한의 관심과 투자는 할 것이다~, 웬걸, 관심이 없어도 너무 관심이 없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최순실농단사태를 접하면서 광주로 와야 할 문화국책사업비가 딴 데로 가버린 것이다. 그 많던 문화융성 예산이 다른 데 가서 딴 짓을 했던 것이다.

블랙리스트, ‘요주의 인물명부’에 올랐던 광주·전남 예술가는 134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지역 블랙리스트 중 문학인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다룬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오월의 시인’ 김준태 시인을 비롯해 74명이 포함됐다. 미술계는 허달용 민족미술인협회 광주지회장 등 39명, 음악계는 ‘바위섬’을 부른 가수 김원중을 비롯 7명이 명단에 올랐다. 연극계 10명, 영화계 2명, 전통예술계 2명도 블랙리스트로 분류됐다. 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거나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정부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로 분류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 광주전남 블랙리스트 30여명이 정부 세종청사 앞에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기 1박2일 농성을 벌이고 있다. 언론 보도와 청문회로 블랙리스트가 수면으로 드러난 이후, 1만명에 이르는 구체적인 명단이 공개되고 나서 작가, 출판사, 극단, 영화인 문화예술계 전체가 충격에 휩싸여 있다. 출판계에서는 한국의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 맨부커상 수상으로 유명한 한강 작가 등과 더불어 문학동네와 창비 등 유명 출판사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에 놀라고 있다.

이것은 분명 직권 남용, 표현의 자유 침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직권남용과 권리행사 방해죄로 보고있다. 블랙리스트 예술가 입장에서 본다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침해고 정권에 의한 검열·사찰이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보유하고 있는 광주는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를 엄중하게 보아야 한다. 사실 이 정권이 문화융성위원회를 탄생시켰을 때만 해도 지역 문화예술계는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문화융성은커녕 문화파탄을 초래했다. 순수 창작지원 예산은 522억원에서 274억원으로 반 토막 났고, 차은택이 추진한 사업비는 903억원으로 2년 새 8배나 폭증했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투입될 예산이 차은택 사업비로 흘러갔다. 흥청망청 써버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흥행에 실패했고, 졸속으로 만들어진 여러 프로젝트는 허울 좋은 껍데기로 남아있다. 국민 혈세가 결국 일부의 욕망을 채워주는 사금고로 전락하면서 단군 이래 가장 큰 국책사업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사업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물론 문화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문화도 생명체로 살아가기 위한 자양분이 필요하고 이를 지켜내고 보장하는 제도와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 달지 않고 복종하면 지원해주고, 소신발언을 하면 블랙리스트로 분류해 지원하지 않은 것은 기본도 원칙도 없는 문화말살이다.

블랙리스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 나라를 충분히 망칠 수 있다. 대통령과 장관이 블랙리스트를 기준으로 인사를 한다는 것은 인사권자의 사감으로 특정 인사를 배제한 것이고, 결국 능력을 갖춘 인사를 적재적소에 쓸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이런 식의 인사가 계속되면, 그 자리를 원하는 후보들은 대부분 소신을 발휘하기보다는 인사권자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몸조심 말조심을 하게 된다. 또 설사 능력을 갖춘 인사가 발탁되더라도, 소신과 전문성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분위기는 전염성이 강해 금세 조직과 나라 전체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게 될 위험성이 커진다. 사고는 옥조여지고, 시각은 좁아지며, 남다른 발상은 질식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앞서 만난 블랙리스트 아들을 둔 택시운전사가 말했다. “이 파문이 명백한 불법행위이고 헌법 위배행위라면, 국가는 블랙리스트 피해자에게 정신적 물질적 배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청구소송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ss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