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 그 희망의 격차 남성숙 광주매일신문 사장 nam48@kjdaily.com

2017년 01월 25일(수) 19:40

어릴적 시골 설날, 도시에서 출세한 친척이 곱게 입고 할아버지께 세배를 왔다. 그 친척이 돌아간 뒤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앞에 앉혀놓고 ‘가난해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손주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요즘 ‘죽기살기 열심히 하면 무조건 된다’는 덕담이 통할까?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사는 청년들에게 ‘모든 것은 너 하기 나름이다’는 말이 설득력 있을까?

‘기울어진 운동장’은 애초부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 축구팀에서 유래했다.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그의 FC 바르셀로나 축구팀은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의 집합소라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현재소속된 축구스타들은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 등이고 거쳐 지나간 왕년의 스타들은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드 등으로 전설적 세계적인 스타들로 구성되어진 세계적인 축구클럽이다. 바르셀로나축구팀은 스페인 국내리그의 우승을 여러차례 차지했고 국가간 클럽팀들의 대항전에서도 수차례 우승경력이 있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명실상부한 축구클럽이다. 바르셀로나팀과 경기하는 팀들은 불공정한 경쟁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천문학적인 이적료와 고액의 연봉을 지불하고 세계각국의 최고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매년 스카웃해서 팀을 구성한다. 상대팀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불공정하고 많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부터 경쟁의 상대가 안되고 죽어라 노력해도 이기기 어려운 팀이라는 패배의식과 바로셀로나팀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감 등에 의해 경기 전부터 패배에대한 나쁜 트라우마를 갖게됐다.

유독 이 시대, 우리나라 많은 청년들이 우리 사회를 불공정한 경쟁,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얘기한다. 기득권세력에게만 유리한 사회적인 제반조건과 법규, 자신들에게 냉소적인 사회적인 분위기 등으로 그들이 정상적인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증거 자료도 있다. 비영리 공익법인 동그라미 재단이 얼마전 발간한 ‘기회불평등 2016: 생애주기별 경험과 인식 조사’ 보고서는 청소년층, 청년층, 중장년층, 노년층이 직면한 ‘기회의 불평등’을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표본 3520명을 조사해 우리 사회에서 가난이 도전의 기회를 가로막는 것을 입증했다.

표본 3520명 중 우리사회가 공평하지 않다고 답한 사람은 62.6%나 됐다. 공평하다고 말한 사람은 10%에 못 미쳤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배경이 개인의 노력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연구에 참여한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회의 불평등을 ‘희망격차’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희망격차란 꿈의 격차를 말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계층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족 배경(상층과 하층), 출신 지역(수도권과 기타 지역 간)과 성(남성과 여성)에 따라서 다른 꿈을 꾸었다. 대학 진학, 가족 형성, 사회이동, 노후 소득, 사회적 성취, 계층이동 등 다양한 차원의 ‘희망’이 달라진다. 이미 고등학생 시기부터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격차가 나타나 성취와 노력 대신 ‘배경’이 삶을 결정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얘기다. 성취를 위한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이들 요소들에 의해서 개인의 삶이 결정되는 경향이 한국 사회에서 더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절박하다. 지난해부터 매서운 추위에도, 쏟아지는 눈발에도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고 ‘불평등’·‘정의’를 얘기하고 있다. 2016년 여름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낸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4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소득집중도가 미국(48%)에 이어 선진국 가운데 두 번째로 높다. 일본(41%)과 영국(39%)보다 높은 것은 물론 프랑스(32%)와 호주(31%)보다는 한참 더 높다. 더 심각한 것은 소득집중도가 1995년 29%에서 2012년 45%로 급속히 악화됐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왜 문제가 되나? ‘불평등의 대가’는 국민을 불행하게 한다. 사회 통합력을 저해하고 사회갈등을 심화시키면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함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킨다. 공교육을 비롯한 공공 투자가 감소하고 경제의 이동성이 하락하면서, 생산성과 효율성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게 된다. 공정한 승부 의식, 기회균등 의식, 공동체 의식 등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당장 바로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기회의 문은 좁아지고 불공정한 경쟁이 만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선 국민 모두가 지친다. 설 쇠고는 갑과을, 금수저·흙수저, 헬조선 등 우리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을 꼬집는 말들이 줄어들길 바란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도록 방치한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올 대통령 선거에선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바꿔주는 정책이 넘쳐나야 한다.

격차가 자꾸 커지고 있다면, 국민이 느끼기에 그 격차가 공정하지 못하다면 ‘게임의 룰’을 정비해야 한다. 그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다.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지는 나라에서 누가 감히 ‘희망’을 꿈꿔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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