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의 발자국 도장이 담장 가에 찍혀 있네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 (220) |
| 2017년 02월 27일(월) 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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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강세황
비단버선 사뿐하게 걸어서 가더니만
중문을 들어서선 아득하게 사라졌군
발자국 잔설에 남아 담장 가에 찍혔네.
凌波羅襪去翩翩 一入重門便杳然
능파라말거편편 일입중문편묘연
惟有多情殘雪在 屐痕留印短墻邊
유유다정잔설재 극흔류인단장변
길을 걷다가 생각난 느낌은 많다. 많은 세월 동안 살아왔던 짜릿한 기억도 더듬게 되고, 살며시 아름다운 내일을 설계하기도 한다. 기분이 좋았던 경험도 떠올리게 되고, 죽창을 맞듯이 기분 언짢은 일도 기억하게 된다. 그렇지만 시인은 길을 걷다가 비단 버선을 신고 사뿐사뿐하게 걸어 중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다. ‘비단 버선 걸음걸이 사뿐사뿐 걸어 가더니, 한 번 중문을 들어서더니 아득하게 사라지고 없네’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그녀의 발자국 도장이 담장 가에 찍혀 있구나(路上所見)’로 번역되는 칠언절구다.
작가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평론가이다. 다른 호는 첨재(添齋), 표옹(豹翁), 노죽(路竹), 산향재(山響齋)으로 알려진다. 남종문인화가 조선 후기 화단의 주도화풍 정착에 기여했다.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벼슬을 단념하고 예술에만 전념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비단 버선 걸음걸이 사뿐사뿐 걸어가더니 / 한 번 중문을 들어서더니 아득하게 사라지고 없네 // 오직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남아 있으니 / 그녀의 발자국 도장이 담장 가에 찍혀 있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거리에서 미인을 보며]로 번역된다. 사람의 심성이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미적인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정서적인 아름다움의 잔영이 승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예술의 생명을 길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여인도 육안으로 보나 후 미적인 시심의 발동은 그대로 멈춰 있지만은 못했겠다.
아름다운 여인이 중문에 들어섰던 모양이다. 그녀가 떠나가고 없지만 꽃향기의 고운 흔적처럼 잔영의 그림자가 남았음을 떠올린다. 여인의 걸음걸이를 보고 느낀 시인은 시상은 ‘비단 버선 신고 걸음걸이 사뿐사뿐 가더니만, 한 번 중문을 들어서더니 아득하게 사라지고 없네’라고 했다. 한 번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줬으면 했겠지만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뜻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다.
화자는 비록 여인이 떠나서 보이지 않지만, 뿌리고 간 흔적이 잔설 속에 남아있다는 상상을 발휘한다. 그래서 오직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잔잔하게 남아 있어, 그녀의 발자국이 잔설과 함께 담장 가에 곱게 찍혀 있다고 했다. 화자의 풍부한 감성이 잔설 속에 속삭이고 있음이 선명하게 보인다.
※한자와 어구
凌波: 미인의 가볍고 사분사분한 걸음걸이. 羅襪: 비단 버선. 去翩翩: 가볍게 걷다. 一: 한번. 入重門: 중문에 들어서다. 便杳然: 곧 사라지다. // 惟: 오직. 有多情: 많은 정이 있다. 殘雪在: 잔설이 있다. 屐痕: (나막신) 발자욱. 留印: 자욱을 남기다. 短墻邊: 담장 가에 찍혀있네.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