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 파리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발자취 (1) 오스카 와일드 “일관성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

2017년 04월 13일(목) 18:42

오스카 와일드가 죽기 전까지 머물렀던 ‘L호텔’.

낭만과 예술의 도시 파리, 화려한 이미지는 오래된 시간이 만들어낸 역사적 풍경과 함께 우리를 과거 속으로 이끈다. 환상을 안고 첫발을 내디딘 파리, 그러나 퀴퀴한 지하철 풍경과 다양한 인종이 모여 진한 땀 냄새를 머금고 있는 도시의 첫인상은 현실과 환상 속의 괴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사기당한 것 같은 불안감으로 하루를 뒤척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력이 넘치는 도시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파리는 상상력이 꿈틀대는 곳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플랫폼이라는 것을.

▶2004 전남대 건축공학박사 ▶2005-2007 전남대 post-doc/청주대 post-doc ▶2009-2011 전남대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4-현재 Paris 8대학, 도시계획 박사과정

파리는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다.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이 파리를 스쳐 갔다. 그들이 머물렀다 간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동경하고 회고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자취는 기록되고 공유되고 있어, 현재에도 그 시대를 목격할 수 있다. 파리를 방문한다면 거리를 산책하면서 그들의 자취를 찾아 낭만적인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도시가 예술을, 그리고 문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만들어 가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른한 봄날의 오후, 권태로움에 일탈을 꿈꾸고 싶어지는 어느 날, 오스카 와일드가 머물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L 호텔로 걸어가 봤다. 짧지만 강렬한 그의 삶을 기억하며. L 호텔에는 ‘1856년 10월15일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가 이 집에서 1900년 11월30일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파리 라땅(Latin) 지구에서 생 제르망 데 프레(Saint-Germain-des-Pres) 지역으로 가는 길에 파리 보자르 근처를 지나다 보면, 영원한 미를 추구하는 탐미주의 오스카 와일드가 머물던 마지막 장소, L 호텔을 만날 수 있다.


■ 불꽃처럼 강렬하고 짧았던 생애

“내 심장은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피어난 장미입니다.”

이와 같은 글로 구애를 한 대상은 오스카보다 16세 연하의 남자이다. 당시 오스카 와일드는 두 아이의 아빠인 가장이었음에도 옥스퍼드 대학생 알프레드 더글라스를 사랑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더글라스의 아버지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고 오스카는 ‘동성애는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된 아름답고 고결한 애정 행위’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에게 1895년 강제 노동형을 선고했고 감옥에 수감됐다.

오스카 와일드의 방.

19세기 유명했던 그의 명성은 혐오스러운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출소 후에는 국적마저 박탈당해, 더글라스가 있는 프랑스로 건너왔다. 그러나 더글라스의 마음은 변한 뒤였다. 지난 1월31일 자로 영국에서 과거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5만여명이 사후 사면을 받게 되면서 오스카 와일드의 명예는 완전히 복권됐다.

동성애자 낙인이 찍힌 채, 영국에서 추방돼 파리로 건너온 오스카 와일드가 1900년 죽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 바로 보자르가 13번지 알자스 호텔, 현재 ‘L 호텔’이다.

이곳에서 그는 숙박료를 지급하지 못한 채, 가난과 지병으로 홀로 사망했다.

현재 오스카가 머물렀던 방은 그에게 청구됐던 미지급된 계산서와 함께 그가 앉아 작업했던 책상을 보존한 채 리모델링됐다.

‘L호텔’ 입구에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얼굴 조각.

당시 허름하고 싸구려 여관이었던 곳이 이제는 5성급 호텔로 변한 만큼 세월은 흘렀으나 여전히 이곳에서는 100년도 넘은 오스카 와일드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그를 기념하는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유명한 희곡 작가로서의 오스카 와일드의 발자취를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이국땅에서 가난에 이곳저곳을 떠돌다 보니 와일드의 개인 소유품이 거의 없다는 점은 그를 기억하고 싶은 이들에겐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손길이 남은 흔적이 파리에 있다. 파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주목해보자. 하루 일당이 4프랑이었던 그 시절, 숙박비는 1프랑이었다고 한다. 임종할 때까지 일 년간의 숙박료 총 180.40프랑을 끝내 지급하지 못했던 가난한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이었던 그가 남긴 흔적을 오랫동안 보존해온 ‘L 호텔’의 혜안이 새삼 부럽기까지 하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 역사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 호텔은 바로 파리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이다.


■ 가면 너머 진실한 삶 추구

불꽃놀이처럼 매우 강렬하고 짧은 인생을 마감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유미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순수한 미 자체를 추구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파리까지 오게 된 삶의 경로는 그의 희극 ‘살로메’에서 느낄 수 있듯 매우 퇴폐적이고 탐미적인 분위기와도 닮아 있다.

호텔 내부 조그마한 로비에 들어서면 오페라 극장을 연상시키는 발코니가 있는 원형 홀이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대중이 자신을 꿰뚫어 볼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았다. “위대함은 오해 속에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평생을 자신에 대한 오해와 전설 속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신화와 전설을 이야기하고 가면을 사용하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솔직하지 못하다. 가면을 건네주면 그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퇴폐적 삶 속에서 진실한 것을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명언, 아포리즘의 대가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명언 중에는 퇴폐적 삶을 추구하는 듯한 그이지만 좌절에 허덕이며 고통 받는 현실에 위로를 주는 글이 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저 멀리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는 그의 글은, 찬란했던 영광과 추락의 사이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 좌절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해도 희망을 보고자 하는 그의 삶의 의지가 숨어있다.


■ 일탈·상상력 꿈꾼 예리한 비평가

“일관성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이다”라고 말한 오스카 와일드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넘어가는 빅토리아의 보수적 사회에서 일탈과 상상력을 꿈꾸는 예리한 비평가이며, 동시대의 숨 막히는 갑갑함을 견딜 수 없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을까? 아니면 빅토리아 사회를 분노하게 한 반항아였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묘비와 묘비명에 찍힌 키스 자국.

그는 현재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잠들어있다. 이곳에는 쇼팽, 에디뜨 피아프, 이브 몽땅, 짐 모리슨, 들라크루와, 모딜리아니 등 유명한 이들이 잠들어 있다. 와일드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누군가 그의 묘비에 키스했고 립스틱 자국을 선명히 남기기 시작한 이후 많은 이들이 하나둘씩 장밋빛 키스 자국으로 그의 묘비명을 장식했다. 립스틱의 유분으로 인해, 묘비가 훼손될 위험이 있자 유리 벽을 설치하는 기념식이 2011년 그의 사망일인 11월30일 진행되기도 했다. 이곳에는 여전히 와일드를 향한 많은 이들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붉은 키스 자국이 가득하다.

봄날의 나른한 이끌림으로 아름다웠던 과거로의 낭만 여행을 시작한 나는, 규칙에 얽매이며 일관성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우리의 자화상으로부터 가면 너머 진실한 삶에 대한 퇴폐적 유혹과 일관성 없는 상상력으로의 일탈을 꿈꿔본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에서도 저 높이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희망을 기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