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준 박사의 책으로 세상읽기] 근대로 가는 젊은 청춘의 사랑이야기 ‘무정’ 이광수 지음 민음사 1만원 도시·지역개발학 박사

2017년 07월 09일(일) 19:06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암담한 환경에 맞서 싸우기 보다는 주저앉기 마련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관습의 굴레는 삶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일제강점기 나라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가난한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절망으로 가득했다. 빼앗긴 나라의 운명처럼 강간을 당한 여자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모욕과 굴종의 시대, 젊은이들에게 조선의 땅을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무정(無情)은 근대소설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조선 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매일신보에 실린 ‘무정’은 1917년 1월1일부터 6월14일까지 126회 연재된 이광수의 첫 장편소설이다. 26살의 이광수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이었다. 무정을 쓴 이유로 매일신보 책임자들의 권유와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 파격적인 한 남자와 두 여인의 사랑과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전개하는 중심축은 ‘이형식’과 신여성으로 나오는 ‘김선형’이고, 또 다른 축은 양반가문에서 기생으로 전락한 ‘박영채’의 기구한 운명과 애틋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무정’은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이 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김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 김장로는 이형식을 장차 사윗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날 옛 스승 박응진의 딸 박영채가 7년만에 찾아온다. 유복했던 집안은 몰락한 상태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르치던 학생의 강도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두 오빠와 같이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후 영채는 ‘계월향’이란 이름의 기생이 돼 서울에 올라와 화류계의 몸을 담고 있었다. 얼굴이 곱고 아직 아무도 손에 넣은 사람이 없어 난봉꾼들에겐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형식을 잊지 못하고 정조를 지키고 있었다. 기생집에 묶인 영채를 빼오기 위해서는 1천원이 필요했다. 형식은 고민 끝에 다방골 계향의 집에 찾아가지만 경성학교 설립자 아들 김현수와 배명식이 그녀를 청량리로 데리고 간 상태였다. 불길한 마음에 쫓아간 청량사 부근 조용한 암자에 울부짖는 한 여자의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치마와 바지는 찢겨나간 상태였다. 박영채였다. 초췌한 몰골로 집에 온 그녀는 “남들이 다 내 살을 뜯어 먹으니 나도 내 살을 뜯어 먹을 랍니다”하고 피가 나는 입술을 더욱 꼭꼭 물어뜯을 때 돈벌이 기계로만 여기고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냉혹한 노파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정조를 빼앗긴 영채는 형식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한통의 편지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다. “선생의 인자하신 얼굴을 대했으니 그만해도 하늘에 사무친 원한은 푼 것이라 하나이다. 후일 대동강에서 선생의 옷에 뿌리는 궂은비를 보시거든 박명한 죄인의 눈물인가 하소소.” 곧바로 형식은 영채를 찾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학교에서는 형식이 계월향을 찾아갔다는 소식이 학생들과 배학감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 변질돼 있었다. 결국 모멸감을 느끼고 경성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그때 교회의 목사가 찾아와 선형과 형식과의 약혼을 권유한다. 형식은 영채의 행방을 찾으려던 마음과 선형의 얼굴이 엇갈리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느덧 형식의 마음이 선형으로 기울고, 두 사람은 약혼에 이른다.

한편, 영채는 평양행 기차 안에서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신여성 김병욱의 도움을 받는다. 그녀는 영채의 신세타령을 들어주고 죽지 말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이 열릴 것이라고 희망을 일깨워준다. 병욱은 영채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뜰히 보살펴 준다.

영채는 병욱에게 새로운 지식과 서양식 감정을 맛보고, 병욱은 영채에게 옛날 지식과 동양식 감정을 배운다. 분주한 시간이 지나가고 영채와 병욱은 함께 동경 유학길에 오른다. 형식과 선형 부부 역시 미국행을 위해 같은 기차를 타게 된다. 마침내 형식과 얽혀있던 두 여인이 마주한다. 삼랑진 정거장에 머무는 동안 네 사람은 수재민을 위한 음악회를 열고 조선의 미래를 새롭게 할 각자의 장래 희망을 나눈다.

무정은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살림이 넉넉하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라고 마무리 되고 있다. /도시·지역개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