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 버드나무 임동옥 수필

2017년 07월 13일(목) 19:53

봄이다.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올랐다. 봄바람이 살랑대니 여린 가지, 연둣빛 치맛자락을 휘날린다. 겨울 내내 움츠렸던 마음이 노긋해진다. 늘어진 버들가지마다 겨울눈이 도드라져 있다. 잎이 나올 듯 말 듯 한 모습이다. 버드나무의 반영이 연못의 윤슬에 흔들리니 운치가 그만이다. 꽃샘추위는 봄을 시샘해도 능수버들은 천만사(千萬絲) 가지를 거느리고 봄 마중 나왔구나.

제 멋에 사는 봄의 낭만주의자, 버드나무에는 이별의 눈물과 사랑의 그리움이 배어 있다. 부안기생 매창은 유희경과 이별하면서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는 이 좋은 날, 차마 못할 것은 잔을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이라고 했다. 기생 홍랑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임에게 주면서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를 본 듯 하라’고 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평양기생 계월은 대동강변에서 고운님을 천만사 능수버들가지로 동여매지 못한 이별을 애달파했다. 반대로 사랑으로 승화한 버드나무도 있었다. 버들아씨 이야기다. 태조 왕건이 나주 완사천에서 빨래하는 아가씨에게 물 한 모급을 청하자. 아가씨는 표주박에 버들잎 하나를 띄워 물을 건넸다. 왜 버들잎을 띄웠냐고 물으니 급히 먹다 체할까 봐 그리하였단다. 훗날 이 버들아가씨는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가 되었다. 이렇듯 버드나무는 눈물어린 이별의 정표요 새로운 사랑의 가교가 되었다.

누구나 꺾어도 된다는 길가의 버들과 담장의 꽃이 노류장화(路柳墻花)다. 노류장화는 몸을 파는 여인을 빗대어 하는 말이고 이들이 함께 노니는 부류를 화류계(花柳界)라고 부른다. 화류계에도 절개는 있었던 것인지. 춘향이 이부종사를 할 수 없다고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자, 변학도가 춘향에게 하는 말. “노류장화가 수절이란 말 괴이하다. 요망한 말 말고 오늘부터 수청을 거행하라.”고 외친다. 또한 창부타령에는 “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볼까.” 신세한탄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게 사랑이고 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던지. “창문을 닫아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노류장화의 마음만 그런 게 아니라 달밤에 버드나무 밑에서 데이트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무에 숨어도 스며드는 달빛, 바람결 따라서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인가.”미완일지라도 버드나무 밑에서 사랑타령을 부르고 싶다.

버드나무는 향일성(向日性) 세계의 이단아다. 하늘로만 솟지 않고 삽살개 갈기털처럼 가지를 늘어뜨린다. 많은 식물은 줄기가 곧고 가지 끝이 하늘을 향하지만 해를 보는 게 부끄러운 버드나무는 땅을 향해 가지가 매달린다. 버드나무는 1년 자란 가지만 늘어뜨리고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은 3,4년 자란 가지까지 내려뜨린다. 이런 가지들은 바람이 부는 데로 유연하게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다. 택견 기본동작과 같이 근육에 힘 빼고 팔다리 흔들거리는 부드러운 힘으로 버드나무는 자신을 강하게 만든다. 버드나무는 보기에는 유연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갖추었다.

버드나무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DNA를 가졌다.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으면 생기가 돌고 새로운 나무로 성장하는 분화전능성(分化全能性)이 있다. 물속에 잠기면 물에 잠긴 부위의 줄기 밑동에 숨 쉬는 기근(氣根)인 부정근을 만들어 역경을 이겨낸다. 태풍에도 가지는 꺾이지 않고 가늘고 긴 잎은 유연하게 흔들리지만 떨어지지 않고 다시 제 모습 그대로 회복하는 탄력성이 있다. 심리학에서 회복탄력성은 다양한 역경과 시련과 실패를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튀어 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 버드나무처럼 인간도 외유내강(外柔內剛)과 회복탄력성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공감은 타인과 동화되는 감정이입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학문적 통섭과 융합에 기반 한 공감의 시대다. 시대에 보조를 맞추려면 공감의 DNA가 발현되어야 한다.

앨런 와이즈먼은 우리나라 비무장지대를 보고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인간의 간섭이 없는 60여 년 동안 비무장지대는 숲이 되살아났고 동물이 뛰노는 동물왕국이 되었다. 강원도 산악지대뿐만 아니라 임진강과 맞닿은 한강하구 장항습지까지 자연이 되살아났다, 특히 버드나무숲으로 이루어진 장항습지는 물고기들의 천국이요 새들의 낙원이며 강과 바다를 살리는 자연의 허파다. 아울러 태풍의 피해를 줄일 뿐만 아니라 해안의 침식을 막는 자연제방이다. 이것이 버드나무의 회복탄력성이다.

봄의 전령 버드나무에서 옛 사람들의 이별과 사랑뿐만 아니라 유연한 회복탄력성의 DNA를 본다. 근육의 힘을 빼고 흔들거리는 부드러운 힘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버드나무, 생존의 묘가 아닐까.


<약력>2001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호남대 교수·학술정보원장, 대한문학 작가상(2006), 신곡문학상(2015), 수필집 ‘계룡산의 아침이슬은 약이 될까?’(2000), ‘게들의 잔치’(2014), ‘꿈꾸는 굴렁쇠’(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