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신문 기사 프린트

[문학마당]차라리 침묵하라 서순초 수필

2017년 09월 18일(월) 19:16

말을 조리 있게 잘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큰 재산이다. 똑같은 내용을 전달한다 하더라도 그 형식의 꾸밈이나 내용의 구조가 월등히 뛰어난다면 전달 효과는 천양지차가 되기 때문이다. 그 악명 높은 히틀러의 연설이 ‘세계의 명연설’의 목록에 오른 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말솜씨 때문일 것이다. 그의 세치 혀로 대중을 선동하는 화술이 얼마나 뛰어났으면 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을 독일인들을 나치독일의 광포한 역사 속으로 몰아갔을까.

생각해 보건데 말의 힘은 실로 막강한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죽이고, 다시 또 다른 말로 죽었던 사람을 발딱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끝없이 감미롭고 아름다운 문장이 황홀경에 이르기도 하고 진저리쳐질 정도로 잔인하고 무서운 광경을 묘사한 하드보일드한 문장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도 한다.

TV나 라디오에서는 말 잘하기로 이름깨나 난 사람들이 나와, 쉴새없이 재기발랄한 말들을 토해낸다. 요즘에는 얼굴이 아무리 잘나고 몸매가 근사해도 말주변이 없는 이들에게 카메라샷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수줍게 웃고 있을 뿐, 말 못하는 죄로 갑자기 방외인이 되고 만다. 심지어 누가 누가 말을 잘하나 견주는 내기까지 하면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고, 시청자 역시 그런 프로그램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판이니 이런 광경이야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말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나는 피로하다. 그것도 몹시 피로하다. 말을 많이 할수록 쓸 말이 별로 없으려니와 결국은 그 말로써 씻지 못할 생채기를 내는 것을 허다하게 볼 수 있다. 하여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두 개의 귀와 한 개의 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많이 듣고 적게 말하여야한다.”라고.

보통 사람들은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듣는 것을 소홀이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말의 형식과 말의 내용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꽉 짜여진 오동나무 반닫이처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말을 내뱉은 사람의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해의 소지를 낳게 하고 말을 말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게 된다. 연예인이 나와서 이별을 한 심정을 고해도, 그 심정의 절절함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별했음을 만방에 알리고 그 심경을 발표해야하는 말의 메커니즘에 대해 집중한다. 그리고 이 비인간적인 의사소통 비극에 대해 지질리고 만다. 게다가 나 같은 시청자가 있을 것을 예상했는지, ‘정말로’와 ‘진심으로’를 남발하며 이별의 소감을 말하는 당사자 역시 자신의 심정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것 같지 않다는 속마음을 내비친다. 말을 하는 자, 그리고 말을 듣는 자 모두 말을 믿지 않는다. 이 말은 말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만난 상대를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말은 넘치고 차는데, 진실로 소통은 되지 않는 다는 것. 말이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면 흘러 다닐수록 사람 사는 풍경이 진경이 되어야 할 터인데,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소통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 다는 것. 그리하여 피로한 하루의 노동을 이겨낸 일용직 노동자 사이에 육두문자가 섞인 드잡이가 벌어지고,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격한 말다툼이 생겨나며, 최근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대통령의 탄핵과, 조기대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유언비어와 패역무도한 말, 말들. 그래서 이 근거 없는 ‘막말’ 퍼레이드로 하여금 정국을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코메디가 생산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침묵 하고 싶다. 나라도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짜배기와 고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볼 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이 말들의 세례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 나는 차라리 침묵함으로써, 이 진정성 없는 말들의 향연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메리카의 인디안 부족 테난 수우족의 지파인 라코타 족은 “침묵은 진리의 어머니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항상 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는 지혜로운 자가 아니었다. 상대를 만났을 때 상대에 대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한동안의 침묵을 지킨 후에 천천히 시작하는 대화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말의 주고받음이었다. 말 앞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침묵이었고. 말이 없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침묵이었다.

침묵하는 시간을 통해 그들은 충분히 생각하고 느끼고 상대를 배려하면서 곡진하고 진실한 의사소통의 기틀을 다졌다. 그들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이었던 셈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바로 재치 있는 대답을 해 넘기는 순발력 보다, 말을 통해 상대를 느끼는 영혼의 교감 상태를 침묵을 통해 완성하는 웅숭깊음. 그 웅숭깊음의 은은한 매력 때문에 나는 “차라리 침묵하라”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침묵하라.

<약력> 1992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한국 문인협회 회원, 광주 문인협회 회원, 남도수필 회원, 황희문화예술상, 대한 문학상 수상, 저서 ‘꽃들의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