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탁의 중앙아시아 초원에서]중앙아시아로 간 한민족 |
| 2017년 10월 11일(수) 19:14 |
|
혜초는 오랜 세월 죽음을 각오하고 낯선 이민족과 거친 자연에 맞서며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은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혜초는 막막한 심정을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만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 간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 돌아보지도 않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망국의 슬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나라에서 이민족으로서 업신여기고 시기를 받았다. 심지어 기록에 ‘개똥같은 고구려 놈’이라고 고선지에게 욕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유약하고 순한 고선지의 성장과정에서 외로움과 고단한 삶은 충분히 짐작 간다. 그는 커서 아버지와 같이 군인이 돼 영민하고 도량이 넓으며 용감해 주위의 인정을 받고 장군이 됐다. 황제 현종의 명을 받아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쪽의 국가를 정복했다.
한민족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으로 거의가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5천여명으로, 이 가운데 1만1천여명이 도중에 숨졌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단장의 슬픔과 지독한 외로움 그 뒤에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중앙아시아로 간 한민족 혜초, 고선지, 그리고 고려인들은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을 극복해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고, 명장으로 서역의 수많은 나라들을 정벌해 세계사를 변화시키고, 잘 사는 민족으로 살아남았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그 본질에 슬픔과 외로움이 있다. 슬픔과 외로움에 빠져 그 틀에 갇히면 자신을 학대하고 점점 쪼그라들어 ‘작은 자신’에 머무르게 된다. 그 틀을 넘어서면 자신의 깊은 곳에서 ‘지혜’가 깨어난다. 지혜는 고단한 삶을 극복하고 ‘위대한 자신’으로 나아가게 한다.
위대한 지혜의 시작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단함이 다가오면 현실을 추상적으로 대해 어떤 의미를 덧붙여 모호한 관념으로 여긴다. 그러면 불행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반복될 수 있다. 깊은 사색으로 현실의 고민거리를 끄집어내서 우선순위를 매기면 오늘과 내일 해야 할 일들을 정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로 간 한민족에게서 공통적으로 관념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직시해 위대한 삶의 지혜를 찾았다. 여느 스님들이 부처에 대해 알아보고 가르침을 생각하느라 일생을 보낼 때 혜초는 19살에 부처가 태어나고, 수행하고, 득도하고 입적한 곳을 찾아 부처로 살고자 했다. 고선지는 당나라 군인으로 살았고 생명이 살 수 없다는 고정관념으로 가득한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으로 진출했다. 비가 오지 않는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고려인은 벼농사를 시작했고 세계 2차 대전에는 소련연방의 일원으로서 주요 식량 보급에 기여했다.
우리는 ‘무엇’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내면서 ‘무엇’이 된 적은 없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관념의 극복은 나 자신에게 큰 숙제였다. 도덕경에서 관념의 초월은 집착에서 벗어나 일체의 머무름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으나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혜초는 자의로, 고선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려인은 타의로 중앙아시아에 간 한민족의 삶에서 슬프고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사는 현대인의 관념 극복의 실마리가 보인다. /전남대 의대교수·우즈벡 보건부장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