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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엄마, 동백꽃 되다 고병옥 수필

2017년 11월 20일(월) 19:13

바람에도 결이 느껴진다. 겨울을 잊지 말라는 바람과 봄을 알리려는 바람이 뒤섞여 얼굴을 스친다. 입으로는 춥다면서 어디든지 나가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센바람을 피하려고 평소에 잘 다니지 않던 이웃 아파트 단지를 지나간다. 양지쪽에 배부른 항아리 모양으로 서 있는 동백나무에는 잎과 꽃이 반반이다. 겨우내 잎 사이사이 품어 안은 동백 꽃송이들이 어미닭 날갯죽지를 뚫고 내다보는 병아리처럼 사랑스럽다. 봄은 동백나무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나무 아래에는 가을 낙엽 떨어지듯 동백꽃이 떨어져 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도 아쉬워서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가을 햇살에 풀 먹인 창호지 말려 놓은 듯 꽃잎이 짱짱하다. 자세히 보니 하나 같이 씨방이 달려 있어야할 꽃자루가 없다. 동굴처럼 비어있다. 고개를 들고 가지를 올려다보니 꽃잎 떨어진 자리에 씨방이 달려있다. 꽃잎만 쏙 빠져 낙화한 것이다. 여물지도 않은 씨방을 남겨두고 서둘러 땅으로 떨어진 동백꽃을 보며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 나이 마흔, 당신의 심장 같은 자식 오남매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듣도 보도 못한 내 나이 열 넷. 엄마와의 이별은 삼일 동안 동네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의식 속에 이루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앉았거나 눕거나 몇 날을 지냈는가. 마지막 날 만장을 펄럭이며 나가는 상여를 따라 가겠다는 나와 말리는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놓아버렸던 정신을 가까스로 차렸을 때는 상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때로는 문득문득 그날 그 상황과 마주치면서 울며 잠을 설쳤고, 그러다 잊고 뛰어놀고 학교도 다녔다. 그렇다고 아주 잊고 살지는 않았다. 아프거나 힘들 때 기쁠 때 외롭고 슬플 때면 더욱 더 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도시로 유학을 가 자취를 하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빨래며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면서 엄마 생각에 울었다. 상급학교 시험 보던 날도 합격자 발표날도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도 보고 싶어 울었다. 뒤틀리고 지치거나 힘든 것도 다 엄마가 일찍 떠나버렸기 때문이라며 원망도 많이 했다.

내가 어려서는 나의 필요에 의해 엄마를 그리워하고 찾았다. 어떻게 어린 자식 다섯이나 남겨두고 젊은 엄마가 그깟 병마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내 놓았을까 원망했다. 비록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드래도 자식 생각을 한다면 간간이 찾아올 일이지 꿈에서 마저 발길 뚝 끊은 엄마가 야속했다.

내가 자식을 낳아보니 부모 자식 간의 정이라는 것은 계량할 수 없는 크고 깊고 애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옆에 있어도 보고 싶고 배불리 먹이고도 더 먹일 것 없나 두리번거린다. 허리끈 졸라매며 밤낮으로 일을 해도 자식 공부시켜 잘 되게 하고픈 것이 부모 마음이다. 하물며 어린 자식을 다섯이나 낳아놓고 떠난 모정은 얼마나 뼈에 사무쳤을까. 신을, 운명을 원망했을 그 비통하고 절절함,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살아날 가망이 없는 현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죽음을 이겨낼 힘이 없어서 생명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 마지막 순간까지도 차마 눈을 감지 못했던 엄마는 할머니가 모든 것 다 잊고 잘 가라고 쓰다듬어 주어서야 눈을 감았다. 그날 엄마는 바람 따라 떠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영 이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살다보면 어느 날 ‘엄마 왔다.’하면서 나타날 것이라 믿고 살았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렇게 가시고 60년, 나는 엄마 생의 두 배 가까이 살았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이라는 것도 알았다. 엄마는 그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셨던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기댈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동백꽃 떨어진 자리에 씨가 여물어 싹을 틔우듯 나도 엄마 떠난 뒤 그리움을 안고 열심히 살아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그래도 먼 훗날 어느 별에서 만날 수도 있음을 믿고 싶다.

땅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과 가지에 매달린 아직은 여물지 않은 씨앗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 간절한 그리움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리다. 비록 서둘러 떨어진 꽃이지만 자양분 되어 기다렸다가 씨앗이 여물어 대지에 닿으면 다시 만날 것이다. 때마침 봄바람이 불어와 동백나무를 흔들고 지나간다. 꽃이 떨어진다. 불어오는 바람이 있기에 생명은 대를 이어가고 그리움이 싹 틀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도 엄마만 생각하면 목울대가 아프고 눈물이 난다.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만 엄마는 지금도 내 가슴속에 있다.

<약력> 1995년 창작수필 등단, 광주문인협회원, 곡성문인협회 부회장, 광주여류수필문학회장, 예술광주편집위원 역임, 수필집 ‘여울물소리’, ‘허수아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가상 2005’ 수상(2006), 제20회 광주문학상 수상(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