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전공대를 만들 ‘제2의 박태준 회장’은 어디에 이정록 |
| 2017년 11월 21일(화) 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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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은 방청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서 토론회를 지켜봤다. 필자는 포럼이 시작하기 한참 전에 자리를 잡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회의실 분위기는 들뜨지 않고 차분했다. 조환익 한전 사장은 토론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전남도·광주광역시·나주시 등을 비롯한 지역 내 이해당사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필자와 안면(顔面)이 있는 대학 관계자들이 여럿 보였다. 청와대 관계자도 참석했다.
토론회에서 한전은 그야말로 밑그림만 보여줬다. 한전의 ‘공대설립 태스크포스’가 6개월 간 활동해 내놓은 결과는 지극히 당위적이었다. 한전이 만들 공대는 ‘세계 최고 수준급 대학’이 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주제 발표자와 지정 토론자들도 이왕에 대학을 만들 거라면 산학 협력을 중시하는 세계 최고 공대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현수막 문구처럼 ‘큰 그림(Big Picture)’을 꿈꿔서 그랬을까. 토론회에서 확인된 사실은 한전이 한전공대 설립에 관심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한전 입장을 모르지 않는다. 아파트 건설하듯 하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세계 최고 에너지 공대를 만들려면 그렇게 할 순 없지 않는가. 게다가 이낙연 국무총리가 제안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사업을 대충 만들 순 더욱 없다. 정부로부터 대략적인 지침도 받아야 한다. 정부와 지역사회가 동의하는 ‘세계 유일무이’한 대학 설립 청사진을 만들려면 긴 호흡으로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을 거다. 그러니 6개월 만에 이 정도의 ‘그림’을 보여준 한전의 발 빠른 대응에 오히려 박수를 쳐야지 싶다.
한전은 조만간 구체적인 청사진을 보여 줄 거다.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된 공약 사업을 한전이 허투루 할 리가 없다. 이 때문에 한전은 포럼에서 제시한 밑그림보다 상세한 대학 비전과 추진 방안과 일정 등이 담긴 로드맵을 곧 내놓을 거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전에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해서다. 우리나라 최대 공기업인 한전도 별수 없다. 공기업의 숙명이다.
대통령 공약인 한전공대는 문재인 정부에서 설립될 수 있다. 에너지 신산업 육성에 필요한 세계적인 인재 확보와 ‘에너지 밸리’ 조성과 활성화를 위해 광주·전남이 목매고 있는 사업이라 그렇다. 열심히 서두르면 2021년이든 2022년이든 문을 열고 학생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다른 공기업이 아닌 한전은 할 수 있다. 언론에 알려진 대로 공대 설립에 5000억원 정도 투입할 여력이 한전엔 있을 거다. 작년에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전력 부문 1위 기업 아닌가.
여기에서 걱정이 생긴다. 대통령 공약 중 많은 사업의 시작은 거창했지만 말로(末路)는 미약해서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좋은 사례다. ACC는 건설 비용만 7000억원 이상 투입된 단군 이래 문화 분야 최대 국책 사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약한 사업이었지만 정권이 두 번 바뀌면서 어떤 우여곡절을 거쳤는지 지역사회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구상했고 이명박 정부가 착공해 박근혜 정부에서 완공된 ACC가 현재 어떤 모습인지 말이다.
걱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계 유일무이’한 대학 설립을 누가 진두지휘할 것이냐다. 그런데 지난 15일 발생한 포항 지진 관련 뉴스 중 하나가 필자 시선을 사로잡았다. “포스텍의 기본기, 지진 이겼다”라는 신문 헤드라인이다. “강진을 견디는 천년 갈 학교를 지어라”라는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엄명으로 1986년에 지은 포스텍 건물들은 멀쩡하다는 보도다(조선일보 11월 18일자).
포스텍은 한전공대가 지향하는 모델 중 하나다. 포스텍은 박 회장이 열정을 쏟은 작품이다. 박 회장은 1985년 3월 대학설립추진본부를 만들고 그해 5월 미국 칼텍(CIT)을 직접 찾았다. 그리고 칼텍에서 얻은 교훈대로 포스텍을 만들었고 포스텍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 회장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포스텍은 1987년 3월 신입생을 뽑은 지 30여년 만에 세계가 인정하는 공대로 성장했다. 박 회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신화였다. 포스텍 홈페이지엔 ‘50년 내에 세계 100대 대학으로’ 라는 슬로건이 내걸려 있다.
한전공대는 문재인 정부 내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될 듯하다. 문제는 누가 이 중차대한 일을 진두지휘할 것이냐다. 지진에도 끄떡없는 건물을 누가 만들 것인가. 정권과 관계없이 아낌없는 재정을 지원할 사람은 누구인가. 한전공대를 세계적인 공대로 만들 주체 말이다. 한전공대를 포스텍처럼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 ‘제2의 박태준 회장’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