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문예르네상스를 꿈꾸다] (9·完) 겨울에 떠나는 남도 ‘불맛’ 기행 강진 백운동별서와 장흥 남포, 그리고 南道의 ‘불맛’

2017년 12월 20일(수) 18:36

강진군 성하면 월하리 백운동 계곡에 자리 잡은 백운동 별서의 겨울 풍경. 백운동 별서는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더불어 호남의 3대정원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전남문화관광재단 남도문예르네상스 콘텐츠관광자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남도는 봄이 가장 빨리 오고, 단풍이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여름의 뜨거운 불덩이가 지나간 뒤에 단풍이 숯불처럼 이글거린다. 날이 추워지면 그리운 게 불이다. 요즘은 난방도 기름보일러나 가스보일러로 하고, 조리도 가스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불맛을 볼 기회가 별로 없다. 아무리 편리함이 우선이라 하지만, 겨울철의 방은 온돌방만한 게 없고, 음식도 불에 직접 조리한 것이 월등히 낫다. 그 불은 물론 나무를 태운 불이다.

남도의 산에도 불이 붙었다. 곳곳이 단풍이다. 네비게이션에서 ‘강풍주의구간’이라고 하는 곳마다 단풍이 좋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 처음 네비게이션이 나왔을 때, ‘강풍주의구간’을 ‘단풍주의구간’으로 잘못 들었던 내 귀는, 지금도 여전히 단풍주의구간에서 운전에 집중하지 못한다. 더구나 불바다니 더욱 그러하다. 단풍주의구간을 지난다.

이대흠 (시인·소설가)

단풍 끝이 월출산에 닿더니, 어느새 월하리이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도 하는 마을, 달뜨는 월출 아래 첫 마을이니, 마을 이름이 ‘달 아래’가 아니겠는가. 나는 노점에 나물 몇 놓고 있는 노인처럼 앉아 있는 별서를 안다. ‘백운동별서’이다. 달 뜨자 구름이 흘렀을까. 구름에 달이 얹혔을까.

백운동별서는 그늘이 많은 곳이다. 동백나무 숲은 틈도 없이 우거져 있고, 활엽수들이 다양하게 모여 있는 계곡 양쪽에 낙엽길이 환하다. 울퉁불퉁한 돌길. 바람이 댓잎처럼 서걱거린다. 사납다. 대부분의 나무는 잎을 떨구고 단풍나무 몇 그루만 등을 켜고 있다. 다산은 이곳에 와서 하룻밤을 자면서 초의에게 백운동 12경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초의의 백운동도에 자신이 시를 지어 백운첩을 남겼다. 나무다리를 건너면 ‘창하벽’(蒼霞壁)이다. ‘바람이 도끼로 깎아 그 틈으로 비 이끼가 스며들었을 것’이란 싯귀를 떠올려 본다. 거기에 한 줄을 보탠다. 그들도 이 바위에 얼마나 마음을 비볐을까. 시간 이끼가 터럭처럼 덮였다.

정원을 처음 만든 이는 이담로로 알려져 있다. ‘원주이씨세계’를 통해 본 역대 동주는 다음과 같다. 1대부터 현재 15대까지이다. 이해, 이빈, 이담로, 이태래, 이언길, 이의권, 이현박, 이덕휘, 이시헌, 이면흠, 이환영, 이대림, 이절묵, 이효천, 이승현 등이다. 다산과 교유했던 이는 이덕휘이고, 이시헌은 다산의 제자이다.

영화 ‘축제’의 배경이 된 장흥 남포 소등섬 전경.

다산이 월출산에 왔다가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다지만, 다산이 이시헌의 스승이었기에 오히려 주인이 미리 청했으리라고 본다. 백운동 정원엔 그늘이 많다. 우거진 숲의 한 가운데이니 여름에도 물이 차다. 유독 햇볕이 오래 머무는 곳이 있다. 모란이 심어진 곳이다. 강진의 모란은 영랑에 이르러 문학의 꽃으로까지 변신했지만, 백운동의 모란과 작약은 그 전부터 이름 꽤나 알렸다. 물소리 베개 삼고 모란 향기 홑이불으로 덮는다면, 이른 여름도 후다닥 달아나겠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 ‘불맛’이 그립다.

남포 소등섬은 영화 ‘축제’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요즘은 굴 구이로 이름이 높다. 강진 장흥의 굴맛이야 비길 데가 없다. 그 중 남포의 굴이 유독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양식이라 하지만, 알고 보면 자연산이라 해야 한다. 종패를 뿌리기는 하지만, 굴이 자라는 곳은 자연 그대로의 돌밭이다. 돌에 난꽃이 피듯 석화 또한 꽃을 피운다. 돌꽃을 먹으면 돌이었던 몸도 꽃으로 변한다. 그런 곳이 남포다.

영화 ‘축제’는 소설과 영화가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연히 이청준 소설가가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화를 말한 것이 원인이 됐다.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에게 그 내용을 소설로 쓰라 했다. 동시에 자신이 영화를 찍는다는 말까지 붙었다. 원작이 미리 있는 영화가 아니라, 원작과 동시에 영화가 제작된 것이다. 그렇게 개봉된 것이 영화 ‘축제’이다. 영화의 첫머리에 서정적인 풍광이 나오는데, 그것의 배경이 남포이다.

장흥 남포수산의 장작불 굴구이.

그 풍경의 중심은 소등섬이었고, 지금도 소등섬은 물이 들고 나는 것을 그대로 몸으로 받고 있다. 소설가는 고인이 됐고, 영화감독은 요즘 영화를 찍지 않는다. 인생은 한계가 분명하고, 자연은 조금 더 오래 간다. 돌이나 시멘트에 꽃이 묻었다. 석화다.

이곳은 일출의 명소이다. 고흥에서 높게 흥하기 위해 떠오른 해가 장흥에서 길게 흥한다. 해의 옷자락에 붙는 꽃엔 석화가 있다. 손톱만한 크기의 석화가 재래종이다. 나머지는 다 원양어선에 붙어 왔다가 토종으로 변한 것들이다. 광양 벗굴도 그런 것의 일종이다. 벚굴, 벅굴, 벗꿀이라고도 한다.

토종의 작은 굴은 강진 청자도요지 근처인 미산과 백사 앞바다에서 나온다. 그쪽에서 나온 굴은 겉은 작지만 속이 오지다. 굴무침이나 생굴로 먹기에는 토종의 작은 굴이 좋다. 하지만 어떤 굴만 토종이라 하기에도 어려움은 있다. 지금은 대부분 굴의 씨를 뿌리고, 그것이 자연에서 자라고 퍼지고, 그것을 우리가 먹는다. 따지고 보면 토종이라는 말도 그 구분이 분명하지는 않다.

장흥 대덕 덕일식당의 빨간 갈비.

남포의 굴은 광양의 벗굴과 미산의 석화 사이의 크기이다. 장흥의 대표 음식으로 쇠고기 삼합과 굴 구이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음식들의 특징과 한계는 있는 재료를 그대로 내어 놓는다는 데에 있다. 쇠고기는 장흥산이라고 할 수가 없고, 굴 또한 그러하다. 원재료가 워낙 좋다보니, 그것에 어떤 요소를 가미하지 않고, 그것만 구워서 판다. 요리가 아니다.

굴 구이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굴을 제공하고, 그것을 구어 먹게 한다. 차이가 있다면 연탄불에 굽느냐, 시중에서 파는 개량 숯에 굽느냐, 장작불에 굽느냐의 것이다. 남포수산에서는 장작불을 고집한다. 그나마 자존은 있다. 거기에 주인이 직접 채취한 굴을 쓴다는 점이 다르다. 남포가 굴 구이로 유명해지면서 장흥의 굴만으로 충당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여수나 완도산굴도 쓴다. 양심적으로 원산지를 밝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많다.

장흥과 강진을 대표하는 ‘불맛’집은 더 있다. 생선구이집이다. 장흥에는 대복생선구이가 있고, 강진에는 옥이네 생선구이가 있다. 옥이네 생선구이에서는 생선구이 백반 사진을 보내준다고 하더니 소식이 없다.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자존심이 있는 집이다. 생선이 떨어지면 손님을 더 받지 않는다.

또 하나의 불맛은 갈빗집이다. 담양 떡갈비와 더불어 광양의 숯불갈비가 남도를 지진다. 거기에 장흥 대덕의 불갈비가 있다. 일명 빨간 갈비라 일컬어지는 덕일식당의 갈비는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색도 붉고 속도 붉다. 매운 맛은 중독성이 있다. 덕일의 불갈비가 그렇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처음에는 먹지 않다가, 먹고 나서는 나중에 또 가자고 한다. 덕일식당의 불갈비다.

겨울 남도의 맛 중, 강진이나 장흥에서 빼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다. 매생이다. 사랑하는 이의 혀가 예상치 않았을 때 내 입 안으로 불쑥 들어온 맛 같은 게 매생이탕이다. 매생이는 유명하지만, 식당으로 들 만한 곳은 없다. 안도현 시인은 광주 터미널 지하식당을 말하지만, 그곳은 매생이의 ‘매’자도 모른 곳이다. 묘하게도 바닷가에서는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넣은 매생이탕을 즐기고, 내륙에서는 굴을 넣는 매생이탕을 즐긴다. 음식의 양면성이다. 풍부한 것을 더욱 개발해 음식을 만드는 경우가 있고,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음식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음식의 두 갈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