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세밑에 수필 김현임

2018년 01월 08일(월) 18:38

지난 해 끝자락에 받은 건강검진이었다. 결과 통보서를 훑던 내 눈에 들어온 노란 형광펜 몇 줄, 돌연한 암 의심 통보에 가슴을 졸였다. 재검진 받기까지 그 일주일의 초조함이 내 생의 방향을 궤도 수정하게 했던가.

‘매사에 떳떳한 사람, 스스로 자랑스러운 사람’ 이는 새 수첩 첫 장에 적어놓은 2017년 새해의 목표였다. 생의 날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하마 모를 리야.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를 망각한 나날들이었다는 뒤늦은 자각이었다. 부질없이 허비해버린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는 당의(糖衣) 벗겨진 약 맛이었고 지구라는 푸른 별에서 당신과의 계약기간은 얼마지 않아 끝나리라는 연락을 받은 세입자처럼 쓸쓸했다.

가는 8월도, 9월도, 시월도 모든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다던 정현종 시인의 시 ‘견딜 수 없네’를 전라도 식 ‘전딜 수 읍네’로 변형시켜 자주 읊조리던 시절 찾아온, 어쩌면 극심한 우울증이었다. 걸핏하면 촛불 곁들인 채식 정찬이 떠올랐다. 오렌지 세 조각에 야채샐러드, 거기에 고향집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햄버거 한 개, 그리고 신선한 오렌지 주스 한 잔. 이는 미국의 사형수에게 베풀어진다는 마지막 식사 메뉴다. 그리고 오래 전 관습과 신념에 따라 그의 생전 측근은 왕과 함께 순장된다던, 어디선가 읽은 고대 왕의 무덤 속 풍경도 펼쳐졌다.

남쪽 벽의 움푹 파인 공간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의 몸은 의복, 무기 홀, 방울, 머리 장식, 기장, 금제 및 금동제 복식, 수천 개의 조개구슬로 만들어진 가슴꾸미개, 목걸이, 코 장식품, 왕관, 모자이크 무늬의 금장식품 등등의 수많은 부장품들로 덮여 있다. 시판왕이라 불리는 남자는 구리로 만든 목관에 안장되어 있으며 세 명의 부인, 두 명의 전사, 검찰관에 경호원, 그리고 그의 애견까지 발이 잘려나간 채 함께 매장되었다.

문득 문득 반문했다. 내세울 것 전무한 나를 끝까지 옹위해 줄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 시시각각 우리를 팽개치고 달아나는 시간의 발을 잘라낼 재주도 없다.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그 첫 말을 딴 ‘진달래!’ 그 건배사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등장하는 납월(臘月)이다. 이미 흘러간 과거에 연연할 까닭이 없다. 안 밖으로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시대, 하니 나중이라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에 아등바등 거릴 필요도 없다. ‘저 광대한 우주와 맞바꿀 가치가 있다는 존재이지만 유난히 고달프다는 우리네 인생길, 슬프면 슬픈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서로를 위무해주는 정(情)이라는 고운 꽃이 어우러져 있음이 다행이랄까. 따뜻한 심성을 잃지 않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이 정도라면 오는 새해에 대한 포부로 적당하지 않을까. 다시 만날 수 없는 2017년과 작별하는 12월,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프로필> 강진 출생. 1991년 예술계신인상 등단. 광주 여류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영호남수필 회원. 수필집 ‘빨간수첩1,2’, ‘초록그림자’, 고전우화번역 ‘재판 받는 앉나꾀(백호 임제 서옥설)발간, 여성문학상, 목포문학상, 허균문학상, 나주문화상, 광주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