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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물려줄까?

주홍
치유예술가·샌드애니메이션 아티스트

2018년 01월 25일(목) 18:54

음악을 좋아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LP판을 수집해 온 남편은 지금도 LP로 음악을 듣는다. 그래서 애지중지 모아온 1천 장 넘는 LP판이 한 쪽 벽을 장식하고 있고, 턴테이블과 전축, 스피커 등이 상당히 집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날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아들에게 남편이 인심 쓰듯이 말했다. “아들아, 이 LP음반들, 나 죽고 나면 다 너 가져라.” 그러자 아들이 바로 대답했다. “아빠, 저는 그거 필요 없어요. 저는 음악 MP3로 들어요. 그냥 주지마세요!” 귀찮다는 말투다. 약간 싸늘한 공기가 흐르면서 조용해 졌다. “아빠가 물려주겠다는데 네가 안 받겠다는 거냐?” “네, 필요 없으니까요. 저는 스마트 폰만 있으면 되거든요!” “이거 엄청 귀하고 비싼 거야. 요즘은 구하기도 어려워. 너는 아빠가 죽으면 다 버리겠구나?”하고 묻자 아들은 대답이 없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책들도 아들은 갖지 않겠다고 하겠구나.’ 그러면서 “그래, 엄마 아빠는 너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을 거야”라고 약간 서운한 말투로 말했다. 별 반응이 없고 게임만 하고 있다. 정말 아들의 말이 맞는 말이다. 아들에게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 LP판이나 CD음반은 필요 없다. 그저 스마트폰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책이나 음반이나 이런 것들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그 물건들을 남겨 두면 아들은 그 가치를 알고 귀하게 여길까? 모두 사라지겠구나. 아빠가 틀어준 음악을 들으며 자라지만 서로 취향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아들에겐 판을 골라서 먼지를 닦고 턴테이블을 돌려 조심히 바늘을 올려서 음악 한 곡씩을 듣는 그 수고로움은 아주 귀찮은 일일 것이다.

귀하게 음악을 듣는 남편은 아침이면 존 바에즈의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를 LP판으로 들려준다. 소나무 사이로 흐르는 강 River in the pines….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세상이 열리는 느낌이 들고 온 몸으로 노래가 스며들어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들으면 사라지는 시간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 우리는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늘 존재한다고 믿고 살다가 음악을 들으면 사라지고 있는 시간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함께 들었던 이 음악들을 기억할까? 아마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라졌을 때 이 물건들은 기억을 되살리는 키워드가 되어 어떤 사건들을 추억하게 되지 않을까? 물건을 유산으로 남긴다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아이들과 캄보디아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은 가족에게 일탈의 시간을 제공했다. 서로 좋아하는 취향은 다르지만 함께 걸었던 길과, 함께 먹었던 음식과, 함께 머물렀던 호텔과, 그 오래된 사원을 덮은 나무와, 그 숲길에서 들려오는 해금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달콤한 망고의 부드러운 맛과 향기, 그리고 거대한 호수의 원시림 사이로 배를 타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함께 했던 행복한 일탈의 시간이었다. 가는 곳마다 길거리의 상인들이 따라다녔고 우리는 흥정하며 물건들을 샀다. 악기도 사고 스카프도 사고, 팔찌도 사고. 돌아와서 물건들을 바라보니 그 시공간이 저절로 떠오른다. 여행지에서 사온 물건들은 마음이 저절로 여행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은 기억의 키워드다. 여행지마다 자잘하게 구입해서 들고 온 인형들과 소품들이 가득한 우리 집 선반, 라오스의 야시장을 함께 거닐면서 샀던 손바느질 인형들, 인도의 오르차 마을에서 구입한 청동문고리, 히말라야의 나무인형, 북해도의 오르골들, 중국의 수공예품들, 일상에서 문득 사물과 눈이 마주치면 여행의 시간을 추억하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히 음악은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마치 타임머신 같다. 대중음악은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들었던 기억 때문에 더 그런 힘을 발휘한다.

지금 우리의 일상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각자 기억으로 재생될 것이다. 그럼, 우리들이 남긴 물건들과 그것들이 내는 소리는 함께했던 시간을 불러내는 마법을 부리겠지.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엄마를 기억하고 아빠를 기억할 때, 이 사물들은 어떤 기억을 불러낼까? 우리는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물질이나 물건이 아니라 기억을 물려주는 것이다. 아빠가 수집한 LP판이나 비싼 물건들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판을 정성스럽게 닦고 앰프를 켜서 귀하게 선곡한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열었던 아빠, 그 소소한 일상을 즐기고 사는 ‘재미’를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다.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아름답고 인간답게 함께했던 찬란한 순간들을 물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