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에서 본 광주2 주홍
치유예술가
샌드애니메이션 아티스트 |
뉴욕 타임스퀘어에는 붉은 계단이 있다. 빽빽하게 앉아있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 틈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 다양한 군중 속에서 나 역시 하나의 캐릭터일 뿐 자본과 욕망을 상징하는 거대한 광고가 오히려 광장의 주인공이었다. 혼자 있을 때 보다 더 고독한 나를 발견하게 하는 곳이 타임스퀘어였다. 여행자가 되어야 비로소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해외에서 광주가 잘 보이듯 여행자가 되면 내가 더 잘 보인다. 우리는 붉은 계단에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뉴욕의 참혹했던 테러의 기억을 품고 있는 911메모리얼 파크에서 어떻게 퍼포먼스를 할 것인가를 각자 생각하고 있었다. 주제는 ‘천개의 바람꽃이 되어’다. 큰 희생의 경험을 집단무의식에 갖고 있는 광주의 예술가들이기에 어쩌면 5.18민주광장에서 우리가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던 퍼포먼스들은 ‘씻김굿’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메모리얼파크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씻김굿이 될 것이다.
911메모리얼파크는 경찰뿐만 아니라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 곳이라 그 누구의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었다. 연주도 금지되어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말라는 조언들을 수없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행위를 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우리들의 방식으로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일행 중 자화상을 천에 그려 와서 가위로 오려 해체시키는 작가가 있었다. 큰 작품을 현장에 펼치고 가위로 오릴 수 없으니, 출발하기 전에 숙소 앞에서 흑백의 그림을 길게 끈 리본으로 오려 장미꽃을 접었다. 흑백그림으로 만들어진 장미꽃을 들고 우리는 911메모리얼파크로 향했다. 8월초 무더운 날씨에도 우리의 주제 ‘천개의 바람꽃이 되어’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무너진 쌍둥이 빌딩 중 하나는 무너지기 전 모습으로 높은 유리건물이 다시 지어져서 하늘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고, 나머지 공간에는 거대한 사각의 철판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투각되어 새겨져있었다. 그 사각의 네모난 중심부에는 물이 넘치고 있었고, 바깥방향을 향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곳으로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투각된 이름에 맺힌 이슬방울들을 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다가가서 자화상을 해체해서 만든 장미를 이름위에 올려 헌화했다. 경찰이 다가와서 심장이 그렇게 뛰었는지, 추모의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심장소리가 폭포 같은 물소리를 뚫고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팀에 합류한 미국에서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흰 원피스를 입고 악기 케이스를 열었다. 경찰이 다가와서 저지하자 소리를 내지 않고 연주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폭포소리를 배경으로 서서 소리 내지 않는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여신의 모습처럼 아름다웠다. 그 묵음의 바이올린 연주도 경찰이 와서 중지하자 우리는 짐을 챙겼다. 나오려는데 메모리얼파크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우리를 붙잡는 듯 바람이 더 불었다. 이렇게 떠날 수는 없어서 흰 건물 옆에 앉아 종이를 꺼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피리소리처럼 ‘천개의 바람이 되어’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연주자는 이미 몰입해서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플루티스트의 아름다운 연주가 사람들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그녀의 소녀 같은 모습은 마치 천사 같았다. 바퀴달린 큰 쓰레기통을 밀고 가던 지쳐 보이는 청소부가 연주자 옆에 멈춰서 곡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경찰도 멈춰서 한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연주가 끝나자, 경찰은 “당신 여기서 연주하고 돈 받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연주자가 “아니다. 나는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니까 그럼 계속 연주해도 된다고 허가를 해준 것이다. 경찰의 마음을 열게 한 음악의 힘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바이올린과 플룻 연주에 맞춰 신발을 벗어서 길을 내고 그곳을 무대로 느리게 아리랑 춤을 추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며 말없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려서 신발 밑에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끼워 넣고, 흑백 자화상을 오려 만든 장미꽃들은 길을 낸 신발에 꼽아두고 영혼과 대화하듯 의식을 치루는 춤을 췄다. 바이올린 소리와 플루트 소리는 번갈아가며 조화를 이루고 예술가들은 모두 맨발로 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갑자기 주어진 우리의 무대는 너무 완벽해서 놀라웠고 눈물이 날 만큼 연주와 춤과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 ‘아리랑은 전체무의식에 흐르는 음악이구나…’ 묵음의 연주를 하던 바이올리니스트,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음악과 춤 아리랑, 그리고 금지된 경계를 허물어버린 플루트 연주를 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