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히 11월일까… 나의갑 |
| 2018년 11월 04일(일) 18:25 |
|
어둠은 완벽했다. 무덤 속에서 갓 파내 온 것처럼 한 줌의 빛도 허용하지 않았다. 새까만 빛을 내며 어둠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1980년 5월20일 밤, 맨 처음 광주를 집단으로 쏘았던 ‘광주역 전투’가 있던 날 밤 우리(나와 후배 기자)는 한 무리의 시위대를 따라다니다 가톨릭센터 뒤쪽 사거리에 이르러 매복 중인 공수부대한테 덮침을 당해 오도 가도 못하는 시간을 만나고 말았다.
어둠이 말을 걸어왔다. 어둠도 때론 빛이며 지금 내 어깨에 기대어 있는 건 너희라고. 나 없으면 너희 둘은 꼼짝없이 죽고 만다고. 너희를 내 품에 안고 있으니 내가 너희를 숨겨 주고 있다고.
우리는 신문사(전일빌딩) 뒤쪽 사거리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짐작대로 군인들 여남은이 등허리에 총을 어슷하게 메고 오른손에 진압봉을 든 채 어둠을 경계하고 있었다. 물론, 가톨릭센터 뒤쪽 사거리에도 군인들이 놓여 있었다. 두두두두, 금방이라도 훈련된 군화들이 달려들 거 같은 무섬증이 부걱부걱 괴어올랐다. 사거리에서 사거리까지의 거리가 100미터도 안 되는, 좁다란 길에 갇혀 있다는 게 확인된 순간, 요의가 기어 나왔다.
지금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그 가톨릭센터다. 5·18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청이 들어 있던 센터에 기록관이 둥지를 튼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 광주YWCA, 광주YMCA, 녹두서점, 전일빌딩과 함께 센터(금남로3가)가 5·18을 상징하는 6대 건물 중 하나인 까닭이다. 만약에 금남로(1-5가)의 중간쯤에 센터가 자리하지 않았다면, 광주는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 봄날, 금남로는 거대한 파도였다. 자꾸만 밀고 밀리며 핏빛 포말로 부서졌다. 전두환그룹의 특별과외를 받은 군홧발과 독한 진압봉, 가슴을 찌른 대검을 피해 몸을 구했던 ‘긴급 피난처’가 센터였다. 이 또한 센터의 5·18 기능이라면 기능이다.
얼마 전 그 센터에서, 아니 기록관에서 ‘그들의 5·18 생각들’이란 제목의 집담회가 열렸다. 여기서 ‘그들’은 발표를 한 이들로, 광주지역 대학에서 유학 중인 아시아 학생 셋을 가리킨다. 5·18을 “불의에 항거해 스스로를 희생한 용감한 영혼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 이는 자넘 마하르잠(네팔, 조선대 석사과정)이었고, “광주항쟁 이후, 광주정신에 입각한 단체들이 조직되어 1987년 민중의 힘으로 한국 군부독재를 깨뜨렸다”고 한 이는 샤헤드 카예스(방글라데시, 전남대 석사과정)였다. 자넘 마하르잠이 ‘광주정신’의 제1 성분을 적확하게 추출해냈다면, 샤헤드 카예스는 ‘광주정신’의 효용성에 핀트를 두고 있다 하겠다.
그날 플로어는 또 다른 ‘광주정신 사용법’을 학습했다. 비자이 바틸(인도, 전남대 박사과정)이 그걸 가르쳐 주었다. 스물 몇 살 되어 보이는 그는 “광주항쟁은 인간의 원대한 꿈, 저항, 자유, 자율에 관한 인간의 이야기”라면서 콩고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서는 현대노예제, 어린이노동 등 착취를 통해 현대 기기(스마트폰, 컴퓨터, 전기차 등)의 주요 원료인 코발트를 채굴하고 있다”며 “광주정신이라는 빛나는 자원을 갖고 있는 광주가 먼저 그 콩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광주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제품 안에 노예제가 들어 있다면 소비자들도 할 몫이 있다”며 ‘소비자정신’에도 침을 놓았다.
잠시 쉬어 갈거나. 짧은 시 하나 퍼 올린다. 이호준의 ‘11월’이다.
‘괜히 11월일까/ 마음 가난한 사람들끼리/ 따뜻한 눈빛 나누라고/ 언덕 오를 때 끌고 밀어주라고/ 서로 안아 심장 데우라고/ 같은 곳 바라보며 웃으라고/ 끝내 사랑하라고/ 당신과 나 똑같은 크기로/ 11/ 나란히 세워놓은 게지’
‘11월’을 본 건 그저께 신문이었고, 시인의 눈에 11월은 따숩다. 그 따수움에 전염되어, 나는 어느새 ‘그해 봄’에 가 있었다. 그 봄, 광주는 시인의 ‘11월’ 같은 따수움을 생산했다. 사람들은 그걸 ‘광주정신’이라 이름하고 있다.
‘광주정신,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그해 봄’은 이렇게 증언할 것이다. 전두환그룹의 ‘집권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광주만 홀로 피 흘렸으니, 자넘 마하르잠의 말처럼 저항이요, 희생이요, 용기의 연대였고. 주먹밥과 피(헌혈)와 고통을 함께했으니, 나눔이거나 배려의 연대였다고.
지금 한창 무르익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그게 뭣인가. 자동차공장 생산직 연봉의 절반 수준으로 임금을 묶는 공장을 광주에 새로 지어 1만개 정도의 청년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 ‘광주형 일자리’다. 그렇다면 ‘광주형 일자리’에는 고귀한 ‘광주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할 것이다. ‘노사민정 대타협’이란 ‘용기’, 그거 어디 함부로 낼 수 있는 현실인가. 임금을 반(半)으로 깎는다는 것 또한 ‘희생’과 ‘나눔’과 ‘배려’라는 덕목 없이는 불가하다. 청년들의 내일이 밝지 않는다면, 기성세대의 오늘 또한 어찌 밝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 봄의 광주가 함께했듯, 11월의 광주가 함께 가면 이루지 못할 게 뭐 있겠는가. 이호준의 ‘11월’을 함께 노래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