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나PD의 보통날] 얼렁뚱땅 새해계획 정하나 광주시립교향악단 공연기획담당

2019년 01월 14일(월) 18:23

새해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는지? 엄마에게 물었더니 엄마는 따로 계획은 모르겠고 우리 딸이 새해에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몇 가지 계획이랄까, 혹은 각오랄까 하는 것들이 있다. 1. 운동하기, 2. 술 줄이기, 3. 기회 닿는 대로 읽고 보고 듣기, 4. 나와 내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해 주기. 이것들이 잘 지켜진다면 내가 행복할 것이고 내가 행복하면 엄마도 행복할 거라고 하니까 두 사람 몫의 행복을 위해 더 책임감을 갖고 지켜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8년 마지막 날과 2019년 첫날은 본가인 원주에서 엄마와 단란하게 보내기로 했다. 4번 ‘내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해 주기’의 일환이다. 엄마는 새해선물로 가방을 만들어 주겠다며 하루종일 뜨개를 뜨고 때가 되면 신청메뉴를 받아 밥을 해주셨다. 나는 엄마 옆에 붙어 앉아 TV를 보면서 ‘가방 디자인이 어떠하네, 손잡이 위치가 어떠하네’ 얄밉게 훈수를 두고 그리고 또 때가 되면 맛있게 밥을 먹었다. 엄마 밥과 온기로 기운을 장전했다. 꽤 멋지게 완성된 뜨개가방은 덤이다. 사랑을 주러 갔는데, 사랑을 잔뜩 받아만 와 버렸군.

다음날은 3번 ‘기회 닿는 대로 읽고 보고 듣기’ 일환으로 미술관 나들이에 나섰다. 엄마와 신년 세레모니를 마치고 광주에 가야하는데, 바로 가기가 아쉬운 참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들러 전시를 보고 근처에서 수제비를 먹는 코스를 나는 아주 좋아한다. 아침 일찍 청량리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거기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시청역에 내려 프레스센터 앞 버스정류장에서 11번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내렸다. 나는 멀미 때문에 좀 유난스럽다고 할 정도로 버스 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시청 일대를 순환하는 11번 마을버스만은 예외다. 서울시청에서 삼청동까지 버스를 타고 스치는 풍경은 참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참 이국적이라 언제나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면 그 앞에 바로, 좋아하는 미술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첫 주제 전시는 ‘마르셀 뒤샹’전이었다. 미리 알아보고 일부러 간 건 아니었는데, 뒤샹을 만나게 되다니 새해 출발이 좋다. (행복점수 +1을 획득하였습니다.) 뒤샹은 남성용 상용변기에 단지 사인을 해서(가명) 출품한 ‘샘’(1917)이라는 작품으로 익숙한 작가이다. 누구나 한번쯤 학창시절 미술교과서에서 이 변기 사진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 장의 강렬한 사진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해서인지 오해를 받는 작가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현대미술은 고등사기이다’는 명제의 바로 그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텍스트가 더욱 필요할 것 같아 도슨트 투어에 참여했다.

이날 만난 도슨트는 내가 그동안 만난 어느 도슨트보다 믿음이 갔다. 내가 그동안 만난 도슨트는 대부분 ‘스크립트를 충분히 외우고, 그것을 그저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줬다. 하지만 ‘뒤샹전’의 그녀는 전시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청중을 집중시키는 세련된 톤과 매너까지 갖춘 것이었다. 나는 거의 매순간 감탄하며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뒤샹의 1913년 작인 ‘초콜릿 분쇄기 no.1’ 앞에서였던가? 그녀는 뒤샹의 거듭된 변화를 설명하며 “뒤샹은 결심도 잘하지만 실천도 무척 잘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하고 그만의 사족을 달았다. 그 말은 마치 송구영신 예배에서 신도들이 단 한 개씩만 뽑을 수 있는 올해의 말씀카드 속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한해의 지침으로 삼고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뒤샹처럼 결심도 잘하고, 실천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도슨트 투어가 끝나고, 나는 다시 한 번 전시를 천천히 감상했다. ‘뒤샹은 진짜 고등사기꾼이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미술관 관람을 즐겁게 마치고 수제비 집에 갔다.(행복점수 +2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원래 칼국수나 수제비과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또 이곳만은 예외다. 가방과 외투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거의 반사적으로 ‘수제비 한 그릇이랑 동동주 반되 주세요!’하고 외쳤다. ‘아뿔싸! 각오 2번 ’술 줄이기‘를 어쩌지. 이거 뒤샹에게도 도슨트님께도 무척 면목 없게 됐는 걸’ 하고는 수제비와 동동주를 번갈아가며 맛있게 비워냈다. 전시도 맛있고, 음식도 감동적이고. 아니, 전시도 감동적이고 음식도 맛있고. 달큰하게 취해 행복감이 밀려왔다. ‘아, 모르겠다. 내가 행복하면 엄마도 행복하다고 했으니까.’/정하나 광주시립교향악단 공연기획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