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 억새풀 김옥례 수필

2019년 10월 07일(월) 18:57

나이 칠십 고개를 넘어가기 위한 시월의 마지막 밤을 좀 더 멋지게 불태우자며 동창 모임에서 제주도에 갔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섬인데도 먼 나라에 온 듯 이국적인 정취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보고 또 봐도 좋기만 한 가없는 넓은 바다와 산하가 우리를 손짓하며 반긴다.

몇 년 사이 많이 변했다. 멋진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올레길을 거닐 때 제주도가 있음에 감사하며 새삼 정겹게 느껴진다. 안내원이 꼭 가봐야 내 말을 알 것이라며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산굼부리에 갔다. 어른, 아이들까지 불편 없이 걸어가기 편한 길부터 마음에 들었다.

만삭이 된 부인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노모를 휠체어에 태우고 천천히 밀며 무슨 얘긴가 주고받는 모자는 자꾸 나를 뒤돌아보게 했다. 휠체어 노모는 나를 보며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부지런히 다니라며 홀쭉히 야윈 얼굴로 웃으며 말한다.

여기저기서 환호소리가 들리며 자줏빛 억새풀은 ‘나를 보세요’ 하는 듯 저녁노을에 흔들거리며 마음 설레게 했다. 갈대는 여자이며 억새는 남자라고 한다. 여러해살이 풀이라고 하는 억새는 가을의 온 들녘을 흐느적거리며 자태를 자랑하면서 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정상에 오르니 두꺼비 입에서 나오는 약수가 길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약수 맛은 가슴속까지 스며들어 삶의 묵은 때를 씻어내리는 것 같아 시원한 약수를 두 바가지나 마셨다.

친구들 환호 소리에 덩달아 소리치다가 하늘을 보았다. 하얗게 피어오른 뭉게구름이 나를 보며 ‘아픈 남편 혼자 두고 너만 재미냐?’ 하는 것 같아 슬며시 고개가 숙여졌다.

젊었을 때 억새풀잎처럼 날카롭고 때로는 억새꽃 솜털처럼 다정다감함 남편이었다. 등산길에 억새풀과 갈대를 구별 못하고 서로 우겨대다 슬며시 져주는 아량도 있었다. 어느새 억새처럼 하얀 머릿결과 주름살 투성인 남편 얼굴을 보니 생의 남은 세월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골인 지점이 없는 달리기를 둘이서 하고 싶다. 세월 따라 나이 드니 잦은 병치레로 병원을 자주 오가더니 끝내 수술을 받고 입원을 했다.

좀 괜찮으니 다녀오라기에 큰 숨 한번 쉬려고 친구들 따라 여기까지 왔다. 사업이 내리막일 때 내가 마음 고생하는 것을 미안해하던 모습이 오늘따라 저 억새가 부드럽게 흔들거리는 것처럼 아른거린다. 건강이 회복되어서 젊었을 때처럼 살아 숨 쉬는 억새풀잎이 되었으면 싶다. 어서 가서 남편 병수발을 해야지 하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억새꽃 솜털이 내 볼을 스치며 ‘그래 가서 잘하면 될 거야’ 하며 움츠렸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한없이 넓은 억새 정상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낭만을 주는지 조용하다. 계절의 황혼인 들녘과 같이 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칠십 고개를 넘으려니 내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며 차가운 바람이 스친다. 정상에서 서석거리는 억새풀 속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가슴에 모든 것 묻혀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외로움 달래며 이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얼마 남지 않는 여생을 어떻게 마무리 할까? 우선 정다운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 현실적인 것과 습관적인 것을 버리자고 마음다짐도 하지만 억새처럼 그이와 흰 머릿결을 서로 가다듬어주며 잔잔한 모닥불이 되고 싶다. 한참을 혼자서 생각하다 아래를 보니 친구들이 한눈팔지 말고 빨리 오라며 소리친다. 저 억새꽃처럼 칠십 고개를 겸허히 넘기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억새도 내 마음을 아는지 석양에 부드럽게 너울거린다.

<약력> 수필문학 등단, 아시아서석문학작품상, 징검다리수필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광주문인협회 회원, 저서 ‘복조리’, ‘전설의 그림자’, ‘빛살피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