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포은 정몽주의 비석만 남아있구나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 (347) |
| 2019년 12월 03일(화) 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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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 유정
산천은 어제 같은데 세상은 다 변했고
궁중 소리 들린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몽주 비석만 남아 또 한 해가 넘어가네.
山川如昨市朝移 玉樹歌殘問幾時
산천여작시조이 옥수가잔문기시
落日孤城春草裏 祗今惟有鄭公碑
낙일고성춘초이 지금유유정공비
조선의 역사보다는 고려의 역사를 기리는 문인 학자들이 적지 않다. 같은 전제군주 왕조였지만 고려의 역사를 한 격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도 엿본다 하겠다.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이라 부르지만 ‘고려’(高麗)때에 우리나라가 외국에 알려졌기 때문에 ‘KOREA’라고 불렀다. 화자는 고려의 마지막 절신 포은의 핏빛이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죽교를 지나면서 꿋꿋한 단심가(丹心歌)를 상상하며 읊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지금은 포은 정몽주의 비석만 남아있구나’(過善竹橋)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1544-1610)으로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병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1575년(선조 8년) 선종수사찰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을 찾아가 도를 닦았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며 선을 닦았던 스님이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산천은 어제 같이 변함 없는데 세상은 늘 변하고 / 궁중의 소리 들린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 봄풀 속 쓸쓸한 성에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 지금은 포은 정몽주 비석만 남아있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선죽교를 지나며]로 번역된다. 시인은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을 이끌고 전공을 크게 세웠다. 전후 대일강화 등 눈부신 활약은 민족의식 발현에 크게 이바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곧 승군을 통솔하고 체찰사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했고 권율과 함께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세운 것 등은 대사의 큰 공적이라 하겠다.
한 승려가 다리를 지난다. 고려의 절신 포은이 마지막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 개성의 선죽교다. 시인은 산천은 지난날과 같은데 개국을 함께 하자고 손짓한 지 얼마였던가를 회고한다. 봄풀 속 쓸쓸한 성에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지금은 포은의 비석만 남아있음을 회고해 본다. 한 왕조가 쓰러져 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장함마저 감도는 변하는 역사의 흔적이다. 선죽교를 지나는 화자는 태종의 하여가를 상상하며 발을 멈칫했을 것이고, 포은의 단심가 한 수가 은은히 들려오는 듯 했으리라. 그것은 상상일 뿐 포은을 기리는 비석만 남아있음을 본 화자의 모습이 보인다.
※한자와 어구
山川: 산천. 如昨: 어제 같다. 市朝移: 저자 거리와 조야가 많이 변했다. 玉樹歌: 궁중의 노래 소리. 殘問幾時; 멎은 지 얼마나 되었나. 落日: 해가 넘어간다. 孤城: 외로운 성. 春草裏: 봄풀의 속. 祗今: 이에 지금은. 惟: 오직. 有: 있다. 鄭公碑: 정몽주를 기리는 비석.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