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밖 화가들] 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도전, 미술사 혁명 이끈 거장

2019년 12월 11일(수) 18:49

윌리엄 터너 作 ‘헬레푀슬뤼스-출항하는 유트레흐트 호’ (1832)

런던 왕립아카데미의 전시개막 전날, 터너의 그림 바로 옆 쟁쟁한 경쟁자였던 컨스터블의 그림도 함께 걸렸다. 컨스터블의 ‘워털루 다리의 개통’, 터너의 ‘헬레푀슬뤼스 출항하는 유트레흐트 호’.

누가 보더라도 두 작품의 치열한 경쟁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개막 전날이기에 출품한 화가들은 자기 작품을 마지막으로 손질할 수 있었다. 터너는 자신의 그림과 컨스터블의 그림을 한참 보더니, 자신의 그림 아래 부분에 붉은색 물감을 덩어리째 발라버리고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 것일까? 전원풍경을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그린 동료화가의 그림을 보고 벌인 일이라기엔 너무 경악스런 행동이었다. 주변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그림의 운명은 알 수 없었다.

전시개막 전, 화가들과 비평가들의 사교장과도 같았던 전시장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참 뒤, 돌아온 터너는 붉은 물감 위 붓질을 시작했다. 붓을 잡은 손은 순식간에 화면을 쓱 지나가고, 물감덩어리에 불과했던 흔적은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부표가 됐다. 망망대해 무채색 바다 위 붉은 부표라니, 덕분에 그림 속 출항하는 배들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터너는 물감을 개면서 침을 뱉거나 담배를 섞는 행동까지 했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던 터너에게 재료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재료이건 사용하지 못할 것도 없고, 소화해내지 못할 재료도 없었다. 붓질을 확인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일단 붓을 쥔 손이 멈추면 바로 퇴장이었다.

터너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발사였던 아버지와 정신질환이 있었던 어머니.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가 있었다. 그림을 꽤나 잘 그렸고, 좋아했던 아들이 화가가 되기를 적극 지지했다. 또 자신이 운영하던 이발소에 아들의 그림들을 걸어두었고 이발하러 온 귀족들에게 종종 판매되기까지 했다.

터너가 14살이 되던 해,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스무살 무렵부터는 유화도 그리기 시작했다. 24살엔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그리고 27세에 정회원의 영광을 얻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윌리엄 터너 作 ‘자화상’ (1799)

이른 나이에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그 명성만으로도 충분히 편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도전의 시작은 바로 ‘여행’이었다. 초기에는 영국 북부와 스코틀랜드 등 국내를 돌아다녔다. 산세, 협곡, 폭포 등 거대한 자연의 이미지를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여행까지 갔다. 스위스 알프스의 거대한 산맥들이 뿜어내는 기운, 혹여 그 감정이 사라질까 여행 중에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수많은 스케치들, 그 안에 담긴 것은 거대한 자연의 한없는 위력이었다.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십대 중반의 화가였지만, 새로운 도전은 한없이 지속됐고, 고전예술의 근원인 이탈리아를 찾았다. 터너가 좋아했던 화가는 프랑스인이지만 이탈리아 고전미술에 심취한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1682)이었다.

고대의 유적과 일화들을 소재로 풍경을 그리는 고전적 풍경의 대가 로랭의 그림을 넘어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클로드 로랭의 풍경과 빛을 만나고, 콜로세움과 같은 유적들을 보며 손은 끝없이 움직였다.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거치며 빛과 색에 대한 연구는 거듭되었고, 이를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업 안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난 변화의 가운데 있던 영국이었기에 새로이 변화해가는 문명의 모습도 터너의 그림 속 빠질 수 없었다.

거대하고 거센 위력을 가진 자연의 장대한 힘과 문명의 발달로 변화해가는 사회의 모습. 빠른 속도로 달려가며 증기를 뿜어내는 증기기관차, 이로 인해 달라지는 대기의 모습, 그 모든 변화의 흐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낸 광대한 에너지들, 자연스레 형상은 사라지고 모호한 색채로 뒤덮인 이미지가 화면을 꽉 채웠고, 드디어 ‘추상’이라는 모습을 가진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터너 作 ‘눈보라 속에서 출항하는 증기선’ (1842)

‘눈보라 속에서 출항하는 증기선’(1842)은 실제 터너가 눈보라 속으로 들어갔던 경험이 그려낸 그림이다. 선원들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고 네 시간여 동안 폭풍우 한가운데 떠 있었다. 작고 작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그 날의 두려움과 공포감, 거대한 자연의 힘은 빠른 속도로 캔버스를 채워갔다. 형상은 점점 사라지고 색채에 더욱 집중돼갔다. 묘사도 줄어들고 붓질도 적어졌지만,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명확하게 담아가기 시작했다.

빛과 기운을 머금은 대기는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확고히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감정들은 올곧게 그려질 수 있었다. 결코 특정한 어느 형상으로 단언할 수 없는 여러 색채들의 혼합은 이전에 없던 그림을 그려내게 했다. 인상주의의 시작 이전에 터너가 있었음은 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오로지 그림과 함께했던 터너는 생전에 무려 1만9천여점의 스케치와 200여권의 스케치북을 남겼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 건립의 조건하에 모든 그림을 국가에 귀속했다.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19세기 가장 성공한 화가로 남은 터너. 천재적인 재능과 이를 알아봐 준 아버지, 어린 나이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거듭했던 예술가가 발견한 새로운 세계. 풍경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던 터너의 그림은 그야말로 ‘도전과 혁신’ 그 자체였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넘어 자연의 거대한 힘을 그려내며 추상의 영역을 개척해냈다. 어찌 보면 예술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예술이란 이름으로 다시 느껴볼 수 있는 수많은 틈새들. 이를 하나하나 들춰내 보여주는 터너의 그림들 덕분에 위대한 자연의 힘을 다시금 되새긴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터너의 작품은 영국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의 11개 방에 전시돼 있다. 개인의 소유에 그치지 않고, 조국의 자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볼 수 있도록 ‘기부’한 것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를 기념하며 ‘터너상’이라는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에 제정됐다. 매해 젊은 미술가를 선정하고 수상의 영예를 준다.

한 화가의 쉼 없는 도전정신이 만든 세계, 육신은 늙어갈지라도 도전과 용기는 결코 늙지 않았던 터너. 그의 그림들이 뿜어내는 한없는 에너지는 바로 한 예술가의 혁신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