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역밥상 주홍 |
| 2020년 03월 05일(목) 23:56 |
|
‘일’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거의 모든 공연과 행사가 취소되고 강의도, 모임이나 회의도 없다. 물건을 살 때도 1.2m에서 3.7m라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회적 거리를 두고 주고받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삶의 모습을 바꿔 놓고 있다. 일중독처럼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멈춤이 곧 죽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돈’으로 움직이는 쳇바퀴의 바퀴와 바퀴 사이에 거리를 두게 되었다. 쳇바퀴들은 단 한 순간도 떨어져 본적 없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서로 물려서 돌아가기만 했다. 아날로그시계의 부속처럼 쉬지 않고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이 멈추자, 동그란 쳇바퀴는 계속 얽혀서 돌아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다. 그동안 얽혀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한 번도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동그란 바퀴는 자신이 동그란 쳇바퀴가 아니라는 사실을 멈춘 후에 알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시간이 찾아왔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 일 없는 나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지금은 놀아도 되는 바이러스라는 핑계가 있으니까.
“엄마, 2주간 학교 개학이 또 연기됐어요!” 아들은 약간 들뜬 목소리다.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나온다. 기생충영화를 패러디해서 슬쩍 물어본다. “우리아들은 계획이 뭐냐? 하루 종일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게 계획이냐?” “엄마는 왜 나를 미리 짐작해서 단정하세요?” “네가 종일 스마트폰만 잡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잖아?” “요리도 하고 운동도 하고 심부름도 하거든요? 스마트폰 하고 있을 때만 엄마가 나를 보잖아요.” 서로 언성이 높아진다. 종일 거의 함께 있다 보니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가장 사랑한다고 하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던 일상이 반복되다가 방학이 길어지고 모든 일들이 멈추자, ‘가족과 함께’ 라는 새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아이들과 나는 매일 새로운 요리를 실험하고 나는 그동안 못했던 그림을 ‘놀이’로 그린다.
바이러스를 이기는 힘은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다. 재래시장에 나가 비타민이 풍부한 값싼 재료들을 장바구니 가득 샀는데 9천원이다. 겨울 무가 싸고 달다. 달래, 냉이, 쑥 등등 봄나물들이 반갑다. 무생채를 바로 만들어 밥을 비벼먹고, 봄나물도 된장에 무치고, 달래간장도 만들어 따뜻한 밥을 바로 지어 김에 싸 먹으면, 입안에 퍼지는 달래향이 마음을 달래준다. 납작하게 펼쳐진 봄동 배추로 겉절이도 한다. 한 단에 2천원, 대파는 너무 싸다. 고생해서 농사지어 이렇게 팔리면 농부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될 만큼. 대파를 송송 썰어 계란도 부친다. 요즘은 거의 모든 음식에 감기 예방으로 대파를 넣어서 먹는다.
공연도 없고 강의도 없고, 일이 없어서 최소의 생활비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비타민이 풍부한 제철채소들이 싸고 풍성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버지는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적당히 삭힌 홍어가 꼭 상에 오르게 하셨다. “잔치 집에 홍어가 없으믄 된당가? 상다리 휘게 장만해봤자 홍어가 빠지믄 앙꼬 없는 찐빵이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초상집이나 잔치 상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전라도의 삭힌 홍어는 배탈이 없고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막는 효과가 있어서 상여꾼들이 반드시 홍어를 먹은 후에 상여를 매고 동네를 돌았다고 한다. 그래, 오늘의 요리는 홍어국이다. 된장을 풀고 단골 홍어가게에서 얻어온 홍어 뼈를 넣고 보리와 냉이를 넣은 후, 김장하고 남은 냉동실의 고추 양념을 약간 넣어 끓었다. 홍어 뼈는 물러졌고 살들은 다 녹았다. 냄비위로 거품이 올라오면서 온 집안에 홍어냄새가 진동하고 냄새만으로도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캬!” 전라도 예술이다. 된장에 무친 봄나물과 톡 쏘는 갓김치, 그리고 보리싹과 냉이를 넣은 풍미 가득한 홍어국으로 바이러스는 접근금지다. 이것이 전라도의 밥상이다. 이 냄새에 사람들이 다 도망가니 사회적 거리가 저절로 유지되고도 남겠다. 아이들은 냄새 때문에 못 먹겠다고 야단이다. 그렇게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면역밥상이 차려졌고,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밥상머리는 소란스러웠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