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 봄 이야기 수필 박영덕 |
| 2020년 03월 23일(월) 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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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해꾼이 되고 있단 생각을 깜빡 잊고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머쓱해진 녀석들이 쏜살같이 달려가 버리는 바람에 미안스러웠지만, 아이들이 빠져나간 골목을 바라보며 좀처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디서 들은 얘기일까. 따지고 보면 침 섞인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엄마 밥’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산다. 그런데 그 엄마 밥이란 게 기실 별난 것이 아니다. 손에 익은 칼 한 자루와 한쪽이 닳은 놋수저나 국자 하나, 그리고 엄마의 침 몇 방울로 완성이 되는 지극히 소박한 것이다.
음식이 익어 가면 어머니는 당신이 한 입 간을 본 다음 그 숟가락을 다시 음식에 넣고 휘휘 젓는다. 이때 어머니의 혀뿌리는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맛’의 잣대가 되며, 거기서 나오는 어머니의 침은 ‘잘 먹고 건강해야 할 텐데’하는 염원이 되어 음식 속으로 녹아든다.
또 밥을 담을 때는 어떤가. 그릇 안보다도 위로 올라가는 양을 더 많이 퍼 올려서 침을 바른 손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많이 먹고 기운 내라.’ 하질 않던가. 소화 효소와 정성이 담긴 ‘엄마’의 이 진액은 그 어떤 양념이나 조리 테크닉으로도 재생할 수 없는 사랑의 조미료이기에 우리 뇌리에 그처럼 유일한 맛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침은 열정을 태우는 기름이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침은 가히 마술적이다. ‘내 자식들 모두 건강해라.’ 하던 어머니의 침과는 사뭇 다르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간에 나누는 침은 ‘너는 내 꺼야’ 하는 뜨겁지만, 대단히 이기적인 것이다. 해서 ‘침 발랐다.’라는 말은 점잖은 축에 끼질 못한다. 뜨거운 만큼 식을 확률도 높아서 엄마의 침에 비해 그 지속성도 떨어진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침을 나누는 사이가 되면 이미 서로의 마술에 걸려든 것이니 나눠 먹는 음식이 한낱 아이스크림이든, 김치찌개이든, 한 잔의 달콤한 와인이든 간에 함께 나눠 먹는 모든 맛을 믿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채 맛을 본 음식들은 그 눈빛과 함께 떠오르고 숨소리와 나란히 간직된다고 하질 않던가.
봄비 내리는 밤, 선술집에 앉아 생태탕 한 그릇에 숟가락 두 개를 넣어두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두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서로 원망하는 눈빛에 오가는 대화조차 수상했고, 간혹 흐르는 침묵이 한없이 무거웠지만 나는 생태탕 그릇에 담긴 두 개의 숟가락에서 결코 끊어내지 못할 그들의 우정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과의 인연에서 얻어진 정보와는 무관한 것이다. 원수와 한 그릇에서 침을 섞어가며 안주를 나눠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한솥밥 먹은 사이란 말은 어쩌면 침을 나눈 사이란 말이 아닌가 싶다. 가운데 놓인 한 그릇 속의 음식에 침 묻은 숟가락을 부딪치며 먹는 맛은 가족 간이라면 따뜻하고, 동료끼리는 화기애애하며, 연인끼리는 에로틱하지만 그 모두가 한배를 탄 동지라는 유대감으로 뭉쳐 있다.
아침에 먹은 ‘엄마 밥’이 저녁이면 그리워지는 각박한 세태다. 이런 세상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으니 이제 머지않아 벚꽃이 흐드러지고 살구꽃은 또 피고 질 것이다. 그런 날 하루쯤은 봄나물이라도 한 양푼 무쳐 들고 양지바른 산자락에 둘러앉아 숟가락 함께 넣고 ‘엄마 밥’이 그리운 사람들과 한솥밥 정 나누면 어떨까.
골목에 일렁이는 바람이 한결 감미롭다. 앞산 옥녀봉에서 밀려오는 푸른 향기에 온몸을 물들이기에 좋은 날이다. 능선 타고 온다던 진달래는 오늘은 어느 뫼쯤 와 있는 것일까.
박영덕 약력
▶1992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 광주위원회 대표분과위원장, 수필문우회 회원, 대표에세이 회원, 박용철문학상·광주예총문화예술대상·현대그룹문학상 외 다수 수상
▶저서 ‘달개비꽃에는 상아가 있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