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소설가의 세상읽기]‘여성 고통 상품화’ 삐뚤어진 시선이 빚어낸 디지털 야만의 폭주 ‘욕망’이라는 가면 뒤에 감춰진 끔찍하고 불편한 진실 국민적 공분 준엄한 법의 심판 ‘공감대’…여성 대상 ‘사회적 타살’ 경종 울려야

2020년 04월 15일(수) 20:00

ⓒ윤연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박사라 불리는 그는 말했다. 전 국민이 알만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말을 하고 난 직후였다. 피해자들에게는 할 말 없나, 미성년자들 피해자가 많은데 죄책감 안 느끼나, 거듭된 기자들의 질문에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는 호송차에 올랐다.

2019년 2월, ‘노예’라 불리는 여성들의 성착취 사진과 신상정보를 공유하는 텔레그램 채팅방이 있다는 사실이 온라인 유저들에게 알려졌다.

박사라는 닉네임이 유명해진 것은 그가 운영하는 채팅방에서 강도를 더욱 높인 가학적 영상들이 더욱 은밀한 방식으로 유통됐기 때문이다.

그 불편하고 끔찍한 실체가 밝혀지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럴 수 있는가”라고 많은 이들이 이제야 묻는다.

미성년자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장면이 중계되고, 여성들이 자기 손으로 특정 신체부위를 훼손하도록 하면서 노예인증까지 강요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은 것이다. 그런 영상을 보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암호화폐로 결제한 유료회원이 26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한국사회가 품은 참혹함의 어떤 단면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디지털 성폭력 사건에 대해 지금이라도 국민적 공분이 거세게 몰아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와 동시에 26만명이라는 압도적인 숫자를 희석하려는 시도들을 염려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호기심으로 n번방에 들어온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이 다를 수 있다고 야당 대표는 말하고, 한 랩퍼는 박사가 중형에 처해지면 야동 한번 잘못 본 당신의 아들과 어린 동생들이 무기징역이나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며 ‘신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혼자서 은밀히 즐길 권리는 보장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국회의원들은 항변하고, 익명의 온라인 유저들은 피해여성들이 동의해서 촬영한 것 아니냐며 비난한다.

이 사건을 대하는 이들의 반응에서 성폭력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시선, 가해자에 관대하고 피해자의 고통에는 무감하다 못해 가혹한 시선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n번방 사건은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의 단면일 뿐이다.

이미 십 수년 동안 소라넷에서 벌어졌고 세계 최대의 다크웹 아동성착취 사이트인 웰컴투코리아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n번방 동영상들은 웹하드나 SNS를 통해 유통되는 성착취 이미지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라넷은 회원수를 100만명으로 늘려가고 성매매업소의 광고비로 매년 수십억원의 돈을 벌어들였으면서도 운영자 한 사람만 구속됐을 뿐 이용자들은 무사했다.

128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웰컴투코리아의 운영자도 작년에야 검거됐고 겨우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사이트 이용자들은 대부분 초범이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면 디지털 성범죄자들에게 내려진 가벼운 형량은 우리사회의 윤리의식을 지속적으로 낮춰 온 셈이다.

벌써부터 박사의 형량이 많아야 3년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성의 몸을 착취한 범죄 수익을 대가로 3년만 감옥에서 썩으면 된다는 메시지, 정작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사건 이후 가해자의 삶은 무너지기는커녕 사회 복귀가 어렵지 않은 데 반해, 피해자에게는 내일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고통의 시작은 단 한 장의 성적 이미지로부터 시작됐다. 박사가 여성들을 유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서 놀랍기까지 하다.

솔깃한 제의를 통해 성적 이미지를 손에 쥐는 순간부터 그는 피해 여성들을 상대로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유포하겠다는 협박이면 충분했다. 유포하겠다는 말이 협박일 수 있는 것은 그 이미지를 유포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 아니 한국사회 구성원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치심은 피해자의 것이고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피해여성은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라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성이 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피해여성들은 “누구에게도 도움 받을 수 없었고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다”고 말한다. 성범죄 이력보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이력이 더 치명적인 사회, 가해와 피해의 비극적 역설이 공고한 곳,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에 무방비 상태가 돼 갈 때, 설 자리 없는 여성들의 삶을 손아귀에 틀어쥔 ‘박사’ 조주빈은 그렇게 악마가 됐던 것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조주빈은 피해자들에게 그 어떤 말도 건넬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에게 피해여성들은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상품일 뿐이었으니까. 그는 성착취의 가해자가 아니라 전설적인 n번방 운영자의 얼굴을 하고서 국민들 앞에 섰고, 죄에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하는 범죄자가 아니라 숭배자들을 거느린 텔레그램 영웅의 시선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었다. 레전드는 물론 숭배자들이 만들어냈다. 박사가 제공해줄 것이라 상상됐던 가학적 영상들에 대한 욕망, 맛보기 영상보다 더 ‘쎈’ 것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한 26만명의 욕망이 그를 레전드로 만들었다.

회원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로리방’(로리타에서 나온 단어로 미취학 여자 아동을 이르는 은어), 여중생방, 여교사방, 여군방, 여간호사방을 드나들며 여성의 몸을 훼손한 이미지들을 관람하고 그 고통을 소비했다. n개의 방, 그곳에는 n개의 성착취가 있었고, 여성 학대와 유린을 통해서만 충족되는 n개의 욕망이 있었다.

그 익명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 소모되는 육화된 존재로 여성을 바라보는 성문화로부터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

정미경 광주여성가족재단 근무·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저자

결국 n번방은 익명의 대기방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성애화하는 무감각한 한국사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유독 여성에 대해서만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문명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용인되는 사회에서 n번방은 디지털 시대에 영토를 넓혀가는 야만의 다른 이름일는지 모른다. 이 미증유의 야만이 인간이 가장 나중까지 지녀야 할 소중한 것을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범인은 잡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조주빈이라는 인간이 저지른 범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일상을 살고 관계를 맺는 인간으로서의 여성에게서 그가 무엇을 빼앗아버렸는지, 우리사회가 지켜야 될 무엇을 그가 유린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 사회에 안전하게 속할 권리를 박탈하고 발 디딜 곳 없는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명백한 사회적 타살임을, 피해여성들이 경험한 고통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랬을 때, 악마를 탄생시킨 디지털 야만의 폭주를 멈춰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늦기 전에,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n번방’은 누구의, 무엇의 이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