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훈의 일본작가 비평](13)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생존권 외치는 조선인들 치열하게 묘사한 ‘행진도’ |
| 2020년 05월 26일(화) 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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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도’는 조선인들의 총력투쟁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마쓰다 도키코는 그 투쟁의 풍경에 필력을 쏟는다. 시청으로 항의하러 가는 조선인들의 시위행진이 촘촘히 그려지는 배경이다.
총력투쟁이기에 같은 지구의 실업자위원회 멤버들은 물론 다른 곳의 판자촌 동료들도 와서 합류한다. 사건의 전말을 시위행진이 모두 흡입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맞선 조선인들의 총체적 결집이 행진의 양상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노소 모두가 혼연일체가 돼 판자촌을 지키기에 나서는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솜이 비어져 나온 옷을 입고 조선 고무신을 신은 여자 애’나 ‘항상 넝마를 주으러 가는 소년들’까지 뛰쳐나오기 때문이다.
“정말로 (항의하러) 가는 거야? 아저씨”라고 확인하며 묻는 어린애들과 “가야지. 너희들도 가는 거지?… 오늘은 너희들이 가장 앞에 서서 깃발을 드는 거다”라며 어린애들을 행진의 선두에 세우는 류의 답변이 행진의 정황과 사건의 심각성을 알린다.
작가 마쓰다는 이 ‘행진도’에서 실천적인 노동자나 의식 있는 조선인에게나 보일 법한 사상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루하루의 삶에 전력투구하는 조선인들의 소시민적 일상에 초점을 맞췄다.
행진에 나서는 장면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주요인물이 류에서 조선인 부인으로 바뀌는 부분이다. 류에게 주요인물의 역할을 맡겨오던 작가가 조선인 부인에게 바톤터치를 하는 인상이기에 간과할 수 없다.
-조선인 여자 주인공 정옥순-
조선인 부인의 이름은 정옥순(鄭玉順). 마쓰다는 전반부에서 조선인 남자 주인공 ‘류’를 성으로만 불렀다. 하지만 조선인 부인에게는 성과 이름을 명확히 부여한다.
정옥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류가 조선인 어린애는 물론, 조선인 처자들을 살피며 시위행진 참여를 독려하는 곳에서다.
류는 “당신들이 가지고갈 오늘의 주먹밥은 다 만들었나요?”라며 조선인 부인들에게 확인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조선인 부인들에게는 시위행진에 직접 참가해야 할뿐만 아니라 식사준비까지 거들어야 하는 일이 주어졌기 때문.
헌데 마쓰다는 정옥순을 통해 공감하지만 머뭇거리는 조선인 부인의 심적 동요에 초점을 맞춘다.
작년 7월경이었다. 모든 게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식수만은 시가지의 막과자가게에서 일일이 양동이로 받아와야 했다. (조선인) 아낙들은 류 일행의 주선으로 대표를 뽑아 판자촌에도 공동수도를 설치할 수 있도록 시의 수도국(水道局)에 요청하게 됐다. 그때 그녀도 이(李)의 부인 동료들과 함께 대표로 뽑혔다. 하지만 요청하러 가는 시점에 이르자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워”라고 말했다. 그 뒤 같은 상황이 벌어져 전등을 설치하게 됐을 때도 그랬다. (본문 인용)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조선인 남성과 주저하는 조선인 여성의 구도가 엿보인다. 마쓰다는 주체적인 여성의 세계관, 아이덴티티를 구현할 때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마쓰다는 여성이기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지를 작품에 새겼다.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려고 격정적인 호흡을 어떻게 뱉어낼 것인지 묻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마쓰다 도키코는 여성의 애환과 자의식을 누구보다 철저히 작품에 토해낸 작가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품에는 사회적 운동과 여성의 삶 속에서 번민하는 여자 주인공의 고뇌와 갈등이 잘 그려져 있다. ‘행진도’에서는 조선인 여주인공 정옥순에게 그러한 소임이 주어진 것.
물론 ‘여성이니까’라는 진부한 프레임을 걷어내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추구하는 곳에 방점이 찍혀 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마쓰다는 일찍이 그 길을 향해 몸부림치는 여성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시로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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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창가에서
아기를 업고
밥을 짓는다
하지만
우리들은 노동자의 아내다
메이데이가 다가왔지만
파업이 일어났지만
우리들은 가지 않았다
갈 수 없었던 거다
여자, 어머니, 3중의 노예
하지만
혁명의 마지막 줄에 서기 위해
자아
어린애를 등에 업은 채
뛰쳐나갈 때다
우리들의 가장을 돌려보내라
우리들의 생활을 보장하라
(중략)
―1928년
메이데이 때 파업시위에 참가하지 못해서 자성하는 여성의 모습을 노래한 시다. ‘여자, 어머니’이면서도 한편 노동자의 부인으로서 3중고에 시달리는 애환이 잘 드러나 있다.
‘행진도’에서 조선인 부인 정옥순이 이 ‘3중의 노예’의 사슬에 얽매인 상태에서 갈등하며 시위행진의 말미에 합류할 것이지 고민하는 장면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헌데 마쓰다가 지향하는 여성상은 결국 부엌문을 박차고 나아가 참여하는 젠더적 관점이 투사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성상이 극히 액티브한 설정을 내포한 것이므로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1935년 제국주의 권력의 문화통제 분위기에서 판금을 당한 그녀의 처녀시집 ‘참을성 강한 자에게’의 표지에는 아기를 등에 업고 외출하는 여인의 사진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마쓰다는 ‘행진도’에서 문턱 안쪽이나 옥내의 일에 안주하는 정옥순의 모습을 그리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진퇴양난의 입장에서 갈등에 내몰리는 여성의 심리묘사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시위행진=혁명’의 마지막 줄에 서기 위해 뛰쳐나가야 하는지 집을 지키는 소임을 수행해야 하는지 서로 끌어당기는 그녀 내부의 N극 S극의 각투는 치열하다.
물론 류의 부추김이 정옥순의 심적 동요를 더욱 자극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없다. 처음에 정옥순은 “저는 오늘 가지 않겠습니다”, “전 임(林)씨의 부인과 판자촌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류는 “정옥순 씨!”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정옥순의 심적 동요의 원인은 무엇일까. 류가 “당신 남편도 이번에는 참을 수 없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모든 남편들도 부끄럽지 않을까요.(중략) 어린애들까지 모두 가자고 해요”라고 강조하는 표현에서 시위행진의 참여 여부가 의식의 경중이나 이념의 유무와는 무관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옥순은 자신의 애도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류의 얘기를 듣고 눈물을 떨군다. 마쓰다는 “그 얼굴은 콧물과 눈물로 젖었다”라고 새겼다. 정옥순의 심적 동요가 일단 풀리면서 그녀의 갈등은 위기 해소 단계에 접어든다. 그렇다고 정옥순이 곧바로 투쟁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실은 정옥순이 처음 조선인 판자촌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남편만을 의지하는 그녀의 소심한 태도가 류의 눈에 비쳤다. 마쓰다는 정옥순의 심적 동요를 주체적 성향이나 가치관의 상이와 같은 의식적인 차원에서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섹슈얼리티 극복이라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시점에서 거론한 것이다.
남녀 불문하고 부끄러움을 의식하지 않은 채 시위행진에 나서는 근거가 생존권 수호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음을 부인하기 어려우리라.
-시위풍경의 연대와 탄압-
시위풍경은 어떻게 그려질까? 우선 거의 조선인들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과자가게에서 신문에 비스켓과 빵을 싸서 조선인 어린애들 손에 쥐어주며 용기를 북돋는 일본인의 모습이 눈에 띈다. 마쓰다의 작품에는 한일 서민이 연대하는 장면이 여기저기 담기는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판자촌 조선인 노동자 200여명과 애들을 업거나 손을 잡은 부인들이 전차 길을 따라 시청까지 시위행진을 벌이는 풍경. 허나 마쓰다는 이 풍경을 판자촌 조선인들의 격렬한 무력시위로 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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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색과 분홍색과 노란색과 흰색의 조선옷은 아침바람에 훨훨 휘날리며 우뚝 솟은 공장마을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묘사했다. 아름다운 색체가 바람을 타고 생존권 수호와 인간성 회복 운동을 위해 도도히 움직이는 풍경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시위행진이 무사히 진행될 리 없다. 자갈을 밝고 나아가는 구두소리와 치마 펄럭거리는 소리가 파출소 근처에서 들렸을 때 여윈 포플러의 잎사귀 사이로 여지없이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
판자촌 조선인들의 시위행진을 제국주의 경관들이 막아서는 광경을 마쓰다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정원의 높은 벽돌담에 따라붙은 경관은 5명에서 7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고함소리와 높은 구두와 칼로 협박하며 더욱 담 언저리로 몰아넣었다.
“어머, 류 씨가…”
경관 한사람이 한사람씩 남자들을 행렬에서 빼내려고 했다. 칼이 솟구치며 태양 빛에 빛났다.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멈추었다가 다시 달렸다. 경관이 류의 양손을 [4자 삭제] 비틀었다. 대열의 앞을 20명 정도의 경관 무리가 막아섰다.(본문 인용)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