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 몽블랑 585 만년필에 대하여 - 수필 서순초

2020년 06월 08일(월) 19:31

세상이 변했다. 별스럽게 변했다. 그러나 내 책상 서랍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갖가지 만년필과 잉크병들은 변함없이 유효하다.

10여 년 전 지중해 쪽으로 여행을 갔을 때 두바이 공항 면세점에서 잠깐 쇼핑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내 눈에는 먼저 파카 만년필과 잉크병부터 들어왔다. 세계적인 명품들이 즐비하게 진열 돼 있는 쇼윈도마다 조명발을 받아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데 하필이면 그것들에 눈이 꽂히다니. 나는 거침없이 만년필을 사들고 오달진 마음에 이리저리 살피며 희죽거리다 일행들의 눈에 띄어 뜨악한 시선을 받았지만 그래도 흐뭇했다.

어딜 가나 쌀독에 쌀을 비축하듯이 질 좋은 만년필과 잉크만 보면 그냥 못 지나 갈 때가 많다. 지갑을 탈탈 털어서라도 기어코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만지기라도 하고 지나간다.

나는 다양한 만년필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보물처럼 아끼는 것은 몽블랑 585이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마음 속 애인이요, 사랑이며 정이다. 어쩌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가슴 찡한 사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40여 년 동안 언론계에 몸담으신 글방 동인 B선생님께서 나를 가만히 부르셨다. “이제 내게는 소용없는 물건이야.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 줘야지. 이 만년필로 특별한 영감을 받아 부디 좋은 글 쓰시게.”

동인들끼리 모여 합평을 할 때면 회원들 거의가 컴퓨터로 깔끔하게 정리한 원고를 내미는데 유독 만년필로 정서해가던 나를 눈여겨보신 듯했다. 심상하게 넘겨보시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살펴 챙겨주신 큰마음과, 그 오랜 세월 칼럼을 쓰시고 사인을 하셨다는 귀한 보물을 내어주시면서 지으시던 왕년 명 칼럼이스트의 쓸쓸한 미소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딜 가든 그 만년필은 나와 함께했다. 무슨 조화속인지 갑작스런 메모거리가 스치고 지나갈라치면 그 만년필을 굴려야했고, 원고를 쓸 때도 그 만년필로 초안을 잡아야지만 제대로 문장이 풀려나갔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만년필 때문에 큰 소동을 겪었다. 중국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장백산 천지를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느닷없이 마른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굵은 빗방울로 인해 온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간신히 버스에 탑승한 나는 우선 메모지와 만년필이 들어 있는 조끼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잘 펴서 올려놨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비는 그쳤고 나는 미련 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버스는 다른 스케줄에 맞춰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오늘의 일정을 수첩에 정리하려다, 아뿔싸! 그때야 만년필을 꽂아둔 조끼를 놔두고 버스에서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정신이 아니었다. 조끼를 찾을 길이 없다는 가혹한 가이드의 말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높은 언성이 오가고, 무작정 떼를 쓰는 아이처럼 질기게도 매달렸다. 동행했던 동료들마저 그까짓 만년필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저리도 유난을 떨까하는 표정들이어서 나는 야박한 인심에 더욱 분기탱천했다.

이튿날 가이드는 여행사 직원을 동원해 그 탈색된 조끼를 찾아왔다. 나는 서둘러 만년필을 확인하고는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듯 손에 꼬옥 쥐고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귀하게 내 손에 들어온 몽블랑 585 만년필.

14K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검정 잉크물이 활자가 되어 눈앞에 펼쳐지면서 내 무딘 감성을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가 하면, 때로는 눈물에 번진 글씨들이 아련한 옛 추억과 그리움으로 나를 감싸던 날들이 그 얼마던가.

지금은 디지털 세상. 빠르고 편리하다고 해서 차디찬 금속성에 나의 순수한 감성을 저당 잡혀야 하다니….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어색해진 세상에 나 홀로 아날로그 세상을 그리워하며 이미 한물 간 만년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 객기일까, 주책일까, 미련일까. 내 비록 지금 도도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정성을 들일 때는 나는 만년필을 여전히 찾는다. 육필은 쓰는 이의 혼(魂)이요 예(禮)이다. 특히 내가 존경하는 분이거나 깊은 마음을 표현할 때는 어김없이 그 몽블랑 만년필을 찾는다.

오늘도 늦은 시각 몽블랑 만년필과 같이 하고 있다.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은 감촉으로 손가락에 척 감기는 몽블랑 585. 막힘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내가 글씨를 쓰는지, 몽블랑 585가 스스로 쓰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 느낌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옛 시인은 자연과 ‘나’의 합일을 ‘물아일체(物我一體)’로 표현했지만, 나는 만년필로 글을 쓸 때 물아일체를 완전하게 체험 하는 것 같다. 사위는 시방 어둠에 잠기는데, 옆에 잠든 꼬마둥이 손자의 쌕쌕거리는 숨소리와, 싸악싸악 종이에 펜촉이 마찰하는 소리와, 잉크가 종이에 퍼지면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에 취해 이 밤은 깊어만 간다. 불현듯 레드와인 한 잔이 생각나는 밤이다.


<서순초 약력>
▶92년 ‘수필과 비평’ 등단
▶한국 수필가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남도수필 회원
▶황희문화예술상, 대한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