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의 일본작가 비평](14)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생존권 외치는 조선인들 치열하게 묘사한 ‘행진도’

2020년 06월 23일(화) 19:10

1930년 전후의 부관연락선.

지난 회차 글에서 조선인 남자 주인공 ‘류’가 경관들에게 붙잡히는 장면까지 살펴봤다. 작가는 읽는 이가 곁눈질을 할 수 없도록 텐션을 높인다. 리더인 류가 체포됐으니 대열이 흐트러질 법도 한데 조선인 부인들은 서로 격려하며 손을 맞잡고 전진한다. “류씨가! (붙잡혔어. 하지만) 가자, 가자, 가자”라고 외치면서 조선인 부인들과 애들은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마쓰다 도키코는 “가자, 가자, 가자”를 일부러 조선어(가타카나)로 표기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조선인 부인들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언어다. 얼마나 이 시위행진이 비장한 각오로 진행되는지를 알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주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일본인이 먼발치서 방관하는 구경꾼으로 언뜻 비치지만 명확히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점이다.

마쓰다는 “도로 옆에서 생각지도 못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들은 뒤돌아보았다. 자신들의 남편과 같은 소개소 출신의 일본의 동료와 조선의 동료가 이쪽저쪽의 도로 공사장에서 사용하던 곡괭이를 들고 삽을 메고 나와 손을 흔들며”, “분발해!”라고 응원하는 장면을 그려넣었다.

조선인 부인들이 “고맙소”라고 조선어로 응대하는 장면도 작가의 한일연대에 대한 구상을 의식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한일연대의 모습이 작품에 따라 농도의 짙고 옅음은 있을지라도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기에 읽는 이의 집중도를 극대화한다. 물론 그런 가치가 작가의 원체험에서 유래하고 있음은 강조할 나위도 없다.

시위행진은 류 등을 비롯한 조선인 남성들의 체포와 함께 조선인 아낙들과 어린애들만으로 이뤄진다. “돌아보니 이제 그녀들의 대열에서 사내들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는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일본 경관들의 진압태도가 누그러질 리 없다. 그들은 “우리 집이 철거되니 항의하러 왔어요”라고 외치며 “가자, 가자, 가자”고 서로 힘을 돋우는 아낙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손을 위로 쳐든 뒤 아래로 내리친다. 극악무도한 경관. 이곳에서 마쓰다의 표현이 “8자 삭제”로 원문에 표기돼 있으니 경관들의 폭행이 얼마나 잔인함을 동반한 것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조선인 부인들은 저항의 강도를 더욱 높일 뿐이다. 마쓰다는 절묘한 조선어를 아낙들을 통해 내뱉었다. 경관들을 향해 “빌어먹을 놈”이라고 선명한 언어로 쏘아붙인다. 마쓰다의 호흡과 조선인 부인들의 거친 숨소리가 어우러지는 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마침내 경관들은 조선인 부인들의 스크럼 속으로 전원이 뛰어든다. 마쓰다는 “한사람에게 두세 사람이 달려들어 저고리의 어깨 부근을 잡아당겼고 치마를 잡고 흔들었다. 어린애들은 엄마의 무릎을 껴안은 채 돌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이 비도와 저항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어린애들이 목도하는 경관과 엄마의 대립이 ‘비도와 저항’이라는 수사로 응축된다. 경관=비도, 엄마=저항의 구도로 설정한 만큼 마쓰다가 어느 쪽에 연대의 마음을 표출하고 있는지 부언할 필요는 없으리라.

현 시모노세키시의 쓰노시마대교 풍경.

-현실 참여에 갈등하는 정옥순-

한편, 정옥순은 시위행진이 절정에 이를 때까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그동안 그녀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또한 그녀의 심적 상태는 어땠을까.

옥순의 고민은 “남정네들은 어찌됐을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라고 노심초사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본격화한다. 붙잡혀간 류를 떠올리며 자신의 어깨를 저고리 끈이 들추어 질 정도 잡아당겨 집으로 내몬 자들을 원망할 뿐이다. 옥순에게는 류 일행의 체포=‘남성의 부재’가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쓰다는 옥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쓰레기통을 짊어지고(중략) 여느 때처럼 두툼한 뺨에 미소를 띠며 곧장 류가 문을 열고 들어올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자…연거푸 고개를 좌우로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밤에 남편이 돌아오면 뭐라고 이 상황을 얘기해야 좋을지 모를 불안이 연기처럼 피워 올라 목을 잠기게 했다. 더욱이 지금 류 씨와 김 씨와 박 씨 등이 없는 이 판자촌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정도로 두렵게 느껴졌다.(본문 인용)


정옥순이 남편은 물론 조선인 사내들에게 얼마나 의지해왔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류는 그들 조선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옥순이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류 일행에게 도움을 받은 일들이 옥순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친다. 옥순은 회상한다.

옥순이 남편의 곁으로 가려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關)행 선박에 몸을 실은 것은 3년 전이었다. 겨우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 승선허가를 얻은 일, 뱃속에 애를 품은 채 큰 애의 손을 잡고 출항에서 하선에 이르기까지 일본 순사의 감시를 받았던 일 등을 떠올린다. 남편이 6개월 전에 일본에 가서 정착한 후 불러주기를 손꼽아 기다린 만큼 남편 곁에서 둘째 애를 낳고 싶은 마음이 오죽했으랴.

1930년경의 일본도항자 성비를 살펴보면 조선인 여자 100명에 비해 남성은 245명으로 두 배 이상 많았다. 1920년경 남자가 7배였던 점을 고려하건대 조선인 여자 도항자의 증가가 눈에 뜨인다(나이토 세이추, 일본해 지역의 재일조선인의 형성과정). 그런 만큼 옥순에게는 남편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졌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식민지 시절에 일본 내지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는 게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마쓰다가 일본으로 도항하는 조선인 여자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인물로 옥순을 묘사했음은 당연했으리라. 마쓰다는 고국을 떠나는 옥순의 심경을 다음처럼 꿰뚫어봤다.


이제 조선과는 작별이라고 생각하자 몇 세대에 걸쳐 품어온 조국의 땅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으며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홈에서 선착장까지 양쪽에 떼지어 말린 김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하던 동포의 안쓰러운 얼굴. 그 목소리. 수목마저 빼앗긴 모든 산꼭대기. 이제 모든 게 끝이다.(본문 인용)

여성이기 전에 옥순도 조선인이다.

남편을 찾아 나선 몸일지라도 어찌 조국과 고향에 대한 사랑을 저버릴 수 있을까. 당시 부산발 시모노세키행 부관연락선에 승선한 조선인들과 옥순의 핏줄, 피돌기 속도는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마쓰다는 옥순을 통해 현해탄을 건너는 조선인 여성들의 심저 깊은 곳까지 들여다본다.

허면 시모노세키에 내려서 일본을 처음 본 옥순의 인상을 마쓰다는 본문에 어떻게 담았을까. “일본인은 모두 시커먼 기모노를 입고 있는 듯 보였다. 철거덕 철거덕 게다소리가 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본인 모두가 빈틈없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이 왜놈(倭者)들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보낼까…. 그렇게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고 적었다.

식민지시기에 일본 땅에 첫발을 내딛은 조선인 여성의 심적 상태를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그리는 마쓰다의 필체에 회한과 애절함이 묻어난다. 일본인을 대하듯 거리낌 없이 조선인들과 접촉하고 교류했으므로 조선 역사나 문화의 이해도가 일반 일본인들보다 월등히 높았던 작가다.

마쓰다는 식민지시기 일본 내지에 도착해 일본을 처음 접한 조선인의 인상에 대해 충분히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조선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던 ‘왜놈’이라는 속어를 옥순의 일본을 접한 첫인상에 새긴 배경이다.

마쓰다 도키코 고향의 아라카와광산 표지판.

-무엇이 정옥순을 나서게 했나…-

옥순이 조선인 판자촌에 정착한 지 3년이 지났다. 그럼 정옥순을 시위에 나서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녀가 크게 동요하게 된 것은 류를 비롯해 자신을 도운 남성들의 부재를 확인하면서부터다. 남성들의 부재가 옥순을 문밖으로 불러낸다. 그 점에 대해서 마쓰다는 옥순의 회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남편이 일하러 나간 뒤 산통을 느끼고 신음하고 있었을 때 가장 먼저 뛰어온 사람이 바로 류였다. 류가 시가지의 무료조산원에 데려다줘 옥순은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또한 남편이 호안 공사를 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상황에서 관청으로 달려가 치료비를 타내는 등 도와준 사람들도 류 일행이다. 아무리 부엌일에 매달리던 옥순이지만 박차고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정훈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

생존권이 짓밟히는 긴급한 상황에 남녀의 구별이 어디 있으랴. 역할 분담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옥순은 류 일행이 경관에게 체포돼 남성들의 부재를 확인한 순간 문턱을 넘어 시위행진에 나선다.

우리 모두는 조국을 빼앗긴 채 일본내지에서 판자촌을 짓고 하루하루 노동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이 옥순에게 조선인 판자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의지하는 여성에서 자립하는 여성으로, 관망하는 여성에서 참여하는 여성으로 변모하는 옥순은, 가장 빈곤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계급에 속하는 여성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성의 자립과 독립과 참여를 소중한 가치로 삼은 마쓰다 도키코가 추구하던 여성상에 다름 아니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