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이윤배 |
| 2020년 08월 24일(월) 1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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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 집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문상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또 “정승 집 말이 죽었다면, 먹던 밥을 밀쳐 놓고 뛰어가지만, 정승이 죽었다면 먹던 밥 다 먹고 간다”라는 말도 있다. 이 모두 정승이 죽은 후에는 그에게 더는 잘 보일 필요가 없는 까닭에 조문할 이유가 없고, 정승이 살아 있고, 개나 말이 죽으면 정승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조문한다는 뜻이다. 즉, 권력이 있을 때는 갖은 아첨을 다 하지만 권력이 없어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야박하고 삭막한 세상인심을 풍자한 말들이다.
필자 역시 정년 퇴임하고 얼마 전 아들 혼례를 치르면서 이 같은 사실을 절감했다. 몇 년 전 딸을 시집보낼 때는 현직에 있었던 까닭에 결혼식장이 하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아들 결혼식의 경우는 코로나19란 예기치 않은 변수와 함께 설상가상 8월 늦장마까지 겹치고 말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식장에 왔다가 혹여 코로나19에 집단감염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에 하객 초청마저 망설여졌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나이가 찰 데로 차 결혼식을 마냥 늦출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작은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결혼식 초청 대상자는 정말 가깝다고 생각되는 친인척과 지인들만으로 한정키로 했다.
그런데 결혼일 며칠 전부터 폭우를 동반한 늦장마가 한반도를 덮쳐 결혼식이 예정대로 진행될지 심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결혼식 당일은 연일 퍼붓던 장맛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시 그치고 햇빛마저 쨍쨍 났다. 비록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은 아니었으나 무사히 아름답게 작은 결혼식을 마쳤다.
그런데 어느 날 만난 친구가 자신의 딸 아이 결혼식을 치르고 핸드폰에서 결혼식에 오지 않은 지인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하나둘 지웠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그동안 써 오던 전화번호 자체를 아예 새 번호로 바꿔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당시에는 친구들의 행위가 조금 야박하다는 생각과 함께 무슨 뜻인지 잘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필자 역시 이번에 아들 결혼식을 치른 후 비로소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지인 자녀들의 결혼식에서 늘 느낀 점은 결혼식 자체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목적이 온통 그동안 뿌려 놓은 축의금 거두는 데 있지 않나 싶어 입맛이 씁쓸할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예식장에 가면 혼주와 먼저 눈도장을 찍고, 의례적인 축하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실제 예식 참석은 거의 생략한 채, 축의금 내고 식사만 하고 오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주말이나 주일 예식 또한 하객들에게 또 다른 민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결혼식에 안 갈 수도 없는 것이 아직은 감내해야 할 대한민국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혼주인 필자가 지인들을 결혼식에 초청한 까닭은 축의금도 축의금이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격조(隔阻)해 보지 못한 얼굴들을 이번 기회에 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결혼식을 핑계 삼아 식사라도 한 끼 같이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꼭 와 줄 것으로 믿고 기대했던 지인이 끝내 결혼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면서도, 괜히 연락했나 싶은 후회와 함께 서운함도 그만큼 컸다. 그동안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었는데 착각이었나 싶어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제 우리도 서양처럼 가까운 몇 사람이 증인이 되고 가족 단위의 작고 조촐한, 그런 결혼식으로 결혼 문화를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평생에 한 번뿐이라는 예식 업자들의 감언이설에 휘둘려 일회성의 화려하고 낭비적인 결혼식보다는 부부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품앗이’란 의미로 이해되는 축의금 역시 결혼 축하 의미로 낸 것이므로 그것으로 끝나야 옳지 않을까. 꾸어준 돈처럼 되돌려 받고자 기를(?) 쓰는 것 또한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아들 결혼식을 치르고 필자 역시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오지 않는 지인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핸드폰에서 하나하나 지웠다. 더는 여윌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인연이든 먼 인연이든 한 번 맺은 인연은 모두 소중하고 귀한 법인데, “만나면 헤어진다”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