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피목(皮木) - 수필 고병옥 |
| 2020년 09월 27일(일) 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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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은 대웅전 앞마당에서 극락전을 돌아 범종이 있는 작은 마당까지 듬성듬성 매달려 있다. 하늘 아래 또 다른 하늘이다. 발원하는 이들의 주소를 보니 멀리 강원도 동해안에서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다양하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사는 자식들을 위해 부모가 비는 소원이리라. 살아 있는 사람은 물론 돌아가신 분도 이름 앞에 망(亡)자를 붙여 나란히 걸려 있다. 이승과 저승. 생(生)이 다른데 소원은 마음대로 넘나드는가 보다. 가족 사랑하는 마음이 미치지 못할 곳이 있을까.
법당 안에는 오체투지의 자세로 빌고 또 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부처님은 눈을 지그시 뜨고 내려다보신다. 우리 할머니 소원은 하루 세끼라도 배불리 먹여 자식을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었고 어머니는 자식 교육 제대로 해 도회지에 나가 살기를 바랐다. 지금의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소원을 다 이루고도 아직도 바랄 것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다.
종각을 지나 점심을 나누어 주는 곳에 가서 밥 한 그릇을 받아들었다. 오목한 플라스틱 그릇에 네댓 가지 채소 반찬과 흰 쌀밥 한 덩이가 먹음직스럽다. 여기저기 둘러보지만, 식탁도 앉을 자리도 햇빛을 가려줄 그늘도 없다. 서서 먹는 밥일지라도 어찌나 맛있던지. 배부르니 편히 쉴 곳을 찾아 두리번거려진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 앞에서도 오욕칠정에서 한 치도 비켜서지 못한 나인가 보다.
외따로 있는 해우소를 다녀오다 껍데기만 남은 나무를 보았다. 피목(皮木). 어림잡아 어른 두 사람이 팔 벌려야 할 만큼 큰 나무가 목질은 썩어 없어지고 반쪽 껍데기만 남았다. 상흔이 너무 크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위를 보니 우산처럼 잎이 무성하다.
저렇게 큰 나무가 속을 비워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껍데기에 바윗덩이만 한 옹이가 주먹을 불끈 쥔 모양으로 박혀 있고 몸통의 중앙에는 심장을 도려내듯이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상처의 가장자리는 몸부림의 흔적인 양 오그라들었다. 몸통의 이곳저곳에 또 다른 크고 작은 옹이들. 살기 좋다는 최적의 자연환경에 살면서도 남모르는 삶의 고통이 이러하다니. 나무의 속이 온통 시커멓다. 힘든 고통을 겪고 나면 속이 까맣게 탄다는 옛말처럼 사람이나 나무나 생명 있는 것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속을 비워 내고 피운 잎이라서 그럴까. 하늘을 가릴 듯 무성한 잎이 맑고 깨끗하다. 욕심을 비우고 키운 생명이다. 뜨거운 햇볕과 매서운 눈보라를 온몸으로 가려주며 작은 벌레에서 산새들까지 품어 키운 나무. 움직일 수도 없이 한 자리에서만 살아온 나무도 가지가 돋고 잎을 피워 다른 생명이 살도록 보살피는데, 보고 듣고 말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도 불평이며, 기르고 만들고 잡아서 소유하고도 내 몫이 부족하다고 야단인 내가 부끄럽다.
허리를 구부리고 나무 밑둥치를 보았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이 흙과 섞여 썩고 있다. 거름이다.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는 나무가 자신을 조각내어 거름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경이롭다. 눈 부신 햇살, 시원한 바람, 정겨운 물소리, 자연은 자신을 다 주고도 즐거워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석가모니의 몸이다.’ 어느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고개를 들어 부처님을 대하듯 나무를 바라보았다.
<고병옥 약력>
▲ 1995년 창작수필 등단
▲ 광주문인협회 회원, 광주여류수필문학회장 역임
▲ 제20회 광주문학상 수상(2007)
▲ 수필집 ‘여울 물소리’, ‘허수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