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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주홍
치유예술가·샌드애니메이션아티스트

2020년 11월 05일(목) 18:12

누구나 어렸을 때 별명이 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별명이 ‘참말로 왕눈이’였다. 말을 배우는 서 너 살 아이가 엄마랑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고 있으면 빤히 보고 있다가 “참말로!”하고 맞장구를 잘 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못난이인형을 닮았다고 ‘못난이’라는 별명과 함께 인형을 선물받기도 했다. 할머니는 주홍이라는 이름이 좋은 이름이라고 ‘홍자바가지’라고 불렀다. 어렸지만 그 모든 별명이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자, 주홍이라는 이름 때문에 ‘빨갱이’가 별명이 됐다. 박정희 정권의 반공세뇌교육의 시절이라 빨갱이라는 별명은 치명적이었다. 빨갱이 주홍이라고 친구들은 노래를 부르며 놀렸다. 나는 속된 말로 왕따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주홍글씨’가 별명이었다. 학교에서는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대표로 나가서 억울한 매를 맞았다.

때려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형편의 학생들이 주로 본보기로 맞았다. 군대식이었다. 지금의 학교문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당시의 교육현장에서 벌어졌다. 선생님의 슬리퍼는 가난하고 힘없는 부모의 자식들에게는 머리나 뺨을 때리는 도구가 되곤 했다.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는 선생님의 매는 사랑의 매라고 봐 줄 수 있지만, 슬리퍼로 맞을 때는 속이 뒤집어지고 선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 억울하게 맞고 집에 가면, 고생하며 장사하는 엄마에게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 안에서는 ‘엄마, 내 이름 좀 바꿔주세요.’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엄마가 “홍아!”라고 부르는 그 소리가 나는 좋았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색깔이 있는 내 이름은 좋은 이름이 됐다. 사람들은 “예명인가요? 이름이 딱 화가의 이름이군요!”하며 이름이 좋다고 한다. 나는 그냥 나인데 반공교육 집단에서는 ‘빨갱이’가 되고, 중학교 국어선생님이 볼 때는 ‘주홍글씨’가 되고, 작은 엄마가 볼 때는 ‘못난이’가 되고, 동네 아줌마가 볼 때는 ‘참말로 왕눈이’가 되고 할머니가 볼 때는 ‘홍자바가지’가 된다.

밖에서 보고 부르는 나는 나와 상관없이 보는 이의 관점으로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빨갱이로 불리어진 초등학교 시절과 주홍글씨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던 청소년기는 참 우울했다. 나는 그 시절 외롭게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왜 나를 사람들은 마음대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하나의 깨우침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있구나!’ 나를 칭하는 그 어떤 말도 내가 아니라는 것을! 칭찬도 비난도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더 나아가서 나를 빨갱이라고 불렀던 그 친구들이 오히려 빨갱이라는 관념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었다. 즉 나를 별명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자신을 부른 것이다.

꼭 별명만 그럴까? 모든 말이 그렇다. 비대면의 시대를 살다보니 더욱 댓글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들이 많다. 댓글에 인격이 드러나고 삶의 내공도 보인다. 유머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여유와 따뜻함도 댓글로 만나고 격려와 응원도 주고받는다.

하지만 댓글이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는 경우도 많다. 인기 연예인이나 공인들의 죽음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고 그 악성댓글에 감정을 이입하고 마치 그 말이 진실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는 세상에서 말의 그물에 감정이 갇혀버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안타깝다.

내가 타인의 말이라는 그물에 갇혀서 죽고 싶을 때 나는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가를 생각해봤다. ‘오해받고 있고 그 고통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지?’ 나는 내 진실에 귀 기울이고 내 내면과 깊은 대화를 한다.

나를 빨갱이라고 부르면, ‘그가 빨갱이구나’라고 그 진실을 알아차리고 만다. 그래도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가 일어나고 감정이 요동치구나’하고 또 내 잠정을 알아차리고 나면 사라진다. 그래도 마음이 복잡하고 정리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혼자 천천히 근처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찾아 자연을 걸으며 걸음걸음을 바라보고 내 숨소리를 듣고 허밍을 하며 내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가을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듯 다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