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잔 오대교

2020년 11월 15일(일) 17:37

오대교

가슴 깊은 곳에 뜨거움을 담을 때
나는 행복하다네
차가움을 품을 때에도
행복하다네
한 잔으로 살면서
그에게 몸을 기울일 수 있어
한 잔이지만
그를 위해 비울 수 있어
빈 잔으로 탁자 위에 내려져도
나는 행복하다네
(시집 ‘새물내’, 책나무, 2012)


[시의 눈]

물 한 잔, 커피 한 잔, 술 한 잔을 나누는 그 짬을 내기가 어려운 시대를 우린 살고 있습니다. ‘비대면’이라는 말, 예전엔 쓰지 않아 생소했지만 이젠 익숙해지기도 했지요. ‘한 잔’으로 정을 주고받던 때, 하지만 이젠 추억으로 그를 소환할 수밖에 없군요. 채워지고 비워지던 일상을 접고 나니 그만 잔은 쓸쓸해지고 맙니다. 잔은 당신과 지낼 때와 장소를 기대하지만 침묵하지요. 차 있든 비어있든 누굴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잔은 행복했지만요. 하지만 곧 가슴 깊이에 담을 뜨겁거나 차가운 잔의 행복은 계속될 거예요. 그대에게 몸을 더 가까이 기울일 수 있기에, 그 마른 목을 더 축일 수 있기에 그렇지요. 그대를 기다리는 잔은 오늘도 탁자에 놓입니다.

오대교 시인은 함평 출생으로 조선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교사를 지냈고, 2008년 ‘문학광장’과 2009년 ‘시와사람’ 신인상에 당선을 통해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2011년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 등이 있으며, 사물의 외부로부터 내부로 차오르는 소리를 표상화하는 시인입니다. <노창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