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소리 전동호 |
| 2020년 11월 16일(월)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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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雪)을 앞둔 가을이 깊어간다. 만산은 물들고 안개 짙은 아침이 열리는 때다. 찬바람을 밀쳐낸 햇살이 차창 밖 돌탑을 댕겨 오고, 풍년가를 끝낸 태평정(太平亭) 하늘 위로 화평한 날이 이어진다. 은적청람(隱跡晴嵐)과 영산강을 함께 한 성재(聖才) 뜰의 소리도 정겹다. 십여 년 전에 팔순 농부와 마흔 살 소의 일상을 그린 ‘워낭소리’를 내더니, 오늘 ‘매미소리’에는 다시래기의 연희극(演 劇)까지 담아냈다. 어릴적 보고 느낀 감성이 살아 있는 충렬의 고향이다.
남악에도 가을소리가 울렸다. 전남도립국악단의 정기공연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이제야 ‘봄날’이란 이름으로 올려졌다. ‘남도소리울림터’에서 가을을 울먹이게 한 봄날이 됐다. 어찌 보면 그들은 바다의 시작과 강의 끝이 시종(始終)인 것과 같이 애초에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가을의 수확으로 한 겨울을 이겨내다가 새봄을 맞이하며 얼음을 뚫고 다음 가을을 위한 새싹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징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신파극 마냥 중년 남녀의 소리가 시작된다.
언젠가는 그런 봄날이 오겠지, 아프면서도 희망을 노래했다. 5·18 40주년을 기념한 ‘오라토리오 집체극’이다. 이름도 남김없이 스러져간 보통 사람들의 투쟁과 고민을 그려냈다. 80여 단원들이 좁은 무대에 스크린과 층층이 발자국을 더하며 하나가 됐다. 사랑을 실은 합창, 창악, 기악, 무용, ‘꽹과리, 징, 장구, 북’ 사물까지 눈을 홀렸다. ‘밥은 먹고 싸워야지’라며 배고픔을 먼저 챙겼다. 마치 1832년 프랑스혁명을 다룬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의 ‘봄날’도 그들처럼 세계적인 작품이 되게 하면 어떨까? 1979년 10월 부마사태부터 10·26, 1980년 5·18의 아픔을 아름다운 내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광주와 전라도, 아니 우리 세상에는 그런 아픔이 더 이상 없게 하자를 노래하면 된다. 그런데도 하수상한 요즘이다. 마치 ‘정의사회 구현’을 내건 신군부의 폭력과 억압이 다른 말로 바뀐 듯하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는 몰라도 분명 용서받지 못할 일을 반복해선 안 된다. 역지사지와 중용의 미덕이다.
우리의 과거는 분열과 대립이었다. 붕당이란 이름으로 상대를 죽이며 왕권만 강화시켰던 조선은 왜란과 호란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대한민국은 4·3 제주, 10·19 여수, 6·25 전쟁 속에서 이념을 만들며 쪼개졌다. 남북은 대립으로 극화됐고 남에선 인혁당사건과 재일교포·동백림·가족 간첩사건을 더 만들었다. 다른 말이 없는 복종만 강요당했다. 오늘의 평화를 낳기 위한 고난이었다. 그래서 이젠 권력의 남용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입법, 사법, 행정, 언론 곳곳에서 보이지 않게 여전하다. 자기도 당할지 모르는 그 힘을 다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의 전환과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변질은 안된다. 우리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외쳤던 33인의 한 사람, 민족시인,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의인들이 친일로 돌아섰던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평생의 신념인 파랑을 극 빨강으로, 목적을 위해 말을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이라 하면서도 안타까움이 앞선다. 바른 생각을 실천하는 일은 ‘행동하는 양심’이요, 그러지 못하면 위선이라고 했는데도 그렇다.
우리의 꿈과 현실은 대화와 타협 속에서,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씩 여물어진다. 한순간의 권모술수는 ‘너도 그렇게 당한다’가 될 뿐이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나를 먼저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도 나를 이해하며 내 불편을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거다. 자식과의 약속 때문에 돼지를 잡은 증자를 논할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이 내일을 다시 만들게 된다는 사실, 너와 나를 위하고 후대를 생각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어렵더라도 남도소리는 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