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소설가의 세상읽기]범죄와 비범죄 사이의 이야기 범죄는 공동체 규범 위반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자 처벌 대상

2020년 12월 03일(목) 18:44

헌법재판소가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형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1년 7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지난달 24일, 정부는 낙태죄의 완전폐지가 아니라 존치를 선택했다. 여성의 임신중지 결정권을 14주까지만 보장하고 24주까지는 기존의 처벌 예외조항(성폭행이나 유전적 질환 등)에 ‘사회·경제적 이유’를 추가한 것이다.

말하자면 임신 14주까지 여성은 스스로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14주가 지나고 24주 내에서는 명백한 사유가 납득되지 않는 한 임신중지라는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개정안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사회경제적 이유’를 갖지 않은 여성이란 없을진대, 여성의 그러한 행위, 선택, 결정에 대해 누가 ‘사회경제적 이유’의 타당함을 증명할 것이며, 어떠한 권리로 허락과 불허를 결정한단 말인가.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거의 모든 권리(노동권, 교육권, 행복추구권, 건강권 등)와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고, 여성 개인은 자신의 몸에 일어날 변화를 인지하고 예측하면서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할 권리를 온전히 가져야 한다.

따라서 임신중지의 범죄화가 여성의 결정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이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번 개정안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국가 권력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하다.

그런데 ‘태아의 생명권’을 들어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번 개정안을 환영하지 않고 있다. 생명권 보호를 주장하는 이들은 임신을 중지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이유’ 때문에 낙태가 만연해질 것이고 따라서 이번 개정안이 통과되면 낙태죄가 폐지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낙태죄를 폐지하면 낙태가 만연해질 것”이라는 논리는 아주 낯익은, 그러나 한 번도 검증된 적 없는 궤변이다. 간통죄가 폐지되면 간통이 만연할 것이라는 주장을 우리는 십수 년 전에도 보았고, 사후피임약의 약국 판매를 허용하면 성적인 문란함이 극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서 듣는다.

“간통죄가 폐지되면 간통이 만연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역으로 “그렇다면 간통죄가 간통을 방지하고 있었는가?”라고 질문해보자. 간통죄 폐지 이후 간통이 급격하게 늘었다는 통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간통죄가 존치했을 때도 간통죄 무서워 간통 못한다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낙태가 만연해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낙태죄는 낙태를 방지하고 있는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임신중지를 해야만 하는 여성들이 낙태죄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는가?

임신중지라는 결정을 그렇게 쉽게 하는 여성은 없다. ‘낙태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얼마나 큰지 우리 모두 알고 있고, 임신중지가 미치는 신체적, 정신적 영향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유지하는 것보다 중지하는 것이 스스로의 삶에 더욱 충실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기까지, 그들은 가족과도 공유하지 못하고 지지받지 못하는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결론적으로 낙태죄는 낙태를 방지하기보다는, 자기 삶의 중대한 선택을 내리는 여성들을 죄의식과 수치심의 자기낙인으로 몰아세우고, 값비싼 수술비와 안전하지 못한 의료환경으로 내몰고 있을 뿐이다.

어떤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그 행위를 범죄화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말하자면 임신중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지만, 그것을 범죄행위로 규정해 처벌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특정한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그 행위자를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처우하겠다는 뜻이며, 고로 그의 사회적 성원권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임신중지를 결정한 이들이 정말로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어떤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가? 낙태죄를 통해 공적 권력이 보호하겠다는 공동체의 가치는 무엇인가?

2012년 헌법재판소는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는 낙태죄는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이 조항이 보호하려는 가치가 ‘태아의 생명’임을 공식화했다.

즉 임신중지를 시도한 여성을 처벌함으로써 그로 인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낙태죄 논의에서 ‘생명권’이라는 말은 보편적이고 침범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면서 모든 논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쓰이는데, 사실 이와 관련된 법적 논쟁은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다.

법적 인격으로 다룰 것인지조차 합의되지 않은 ‘태아’의 생명권을 명분으로, 국가가 태아의 대리인으로서 여성을 처벌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더욱 심각하게 지적돼야 할 것은, 보편적이고 침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생명권’이 얼마나 선택적이고 자의적으로 쓰이는지 법 조항 자체가 보여준다는 점이다.

생명권이 그렇게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면 유전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결론 내려진 태아의 생명권을 앗아가는 일은 왜 그렇게 쉽게 승인되는가? 1970-8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 인구통제정책으로 가장 높은 성과를 올린 산아제한이라는 이름의 ‘낙태장려’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낙태를 고려하기 전 태아의 심장박동수를 꼭 들려주라”며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전문가들은 감염병 환자와 유전적 질환자의 강제적 임신중절 행태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무는 것일까?

이 같은 질문은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준다. 생명권 대 선택권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여성들은 태아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는 이기적인 존재들로 이해된다.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들의 삶의 맥락과 조건이 제거된 채, ‘상상의 각본’에 따라 여성들을 낙인찍는 방식의 서사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정미경 <광주여성가족재단 근무 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저자>

문제는 문란한 성생활을 책임지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들이 아니라, ‘생명권’을 마치 신성불가침한 권리인 양 들이밀면서 국가에 의해 행해진 ‘신성모독’의 행태들에 대해 눈을 감는 무지한 이들이며, 임신중지의 범죄화를 통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함으로써 결국 여성을 승인받고 허락받아야 하는 이등시민으로 위치 지으려는 가부장적 국가권력이다.

‘낙태죄’는 이미 사문화돼 법의 기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입법 취지 또한 실현하지 못한 퇴행적인 법이다. 사문화됐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언제든 처벌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주는 법은 폐죄돼야 마땅하다.

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여성이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낙태죄가 아니라 다른 사회경제적, 문화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사회의 집단 지성이 더 이상 비생산적인 낙태죄 존폐 논란에 소모되지 않고, 임신중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들을 변화시키는데 쓰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