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자작나무가 있는 풍경 - 수필 최미경

2020년 12월 07일(월) 18:23

강원도 여행의 마지막 밤, 금요일이란 것을 간과한 벌로 눈여겨 둔 숙소에 들 수 없게 되었다. 뉘엿뉘엿, 해는 지기 시작하고 마음은 급한데 웬만한 곳은 예약 불가다.

간신히 입실 가능한 리조트를 알아내고 서둘러 찾아가는데 어둑하고 좁은 길이 한없이 깊은 산속으로 이어진다. 마침내 도착한 꼭대기 그곳은 뻥 뚫린 하늘이 시계를 돌려놓은 듯 아직 환한 세상이다. 한숨 돌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썰렁하고 오래된 느낌이 든다.

빛이 바랜 정문 구조물, 찾는 이 없어 더 쓸쓸해 보이는 넓은 체크인 센터, 문 닫힌 지 꽤 되어 보이는 음식점과 노래방,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목조 주택 단지들.

숙소 내부에서도 풍길 어떤 냄새를 떠올리며 터덜터덜 배정받은 숙소를 찾아가니 문 입구에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불편했던 심기에 반짝 햇살이 들었지만 상상했던 대로 내부의 집기들이 오래되어 이곳이 영 탐탁지 않다.

대충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리조트 여기저기를 산책했다. 산새 소리뿐 호젓하고 적막하기 그지없다. 날은 저물어가고 지난날의 시끌벅적했을 영화로움이 그려지며 황성옛터 노래가 쓸쓸하게 귓전에 맴돈다.

높은 곳이라 바라보이는 경치는 그만이다. 건너편 산자락이 깊은 주름을 잡고 늘어져 있다. 그때 먼 하늘에서부터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하더니 금방 하늘을 붉게 뒤덮고 이내 어둑해졌다. 산에서 맞는 일몰은 바다의 그것과는 좀 다른 비장한 느낌이다. 깊은 산세(山勢) 때문일까.

발길을 숙소로 돌리던 순간 현관 앞에 서 있는 자작나무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밝은 빛이 지나간 후 하얀 존재감을 더 뚜렷하게 드러낸 나무는 각 호실 앞에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그루씩 심겨있다.

일부러 찾아다닐 만큼 좋아하는 자작나무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났는데 불만이 커 처음에는 온전히 마음에 담지 못했다. 불편했던 마음이 스르르 무장해제 되었다. 안에 들어와 발코니 문을 연 순간 완전히 나를 항복하게 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커다란 자작나무 두 그루. 어디 한번 실컷 느껴보란 듯 발코니 옆에 바짝 붙어 서서 하늘거리는 머리채를 늘어뜨린 채 하얀 나신(裸身)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거리 잠을 자게 될까 걱정돼 허겁지겁 든 못마땅한 숙소에서 이런 횡재를 하다니. 한때 나의 꿈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진 자작나무 숲을 지나는 것이었다. 하얀 군복을 입고 도열하듯 늘어선 자작나무가 달리는 기차를 향해 거수경계를 올려 부치는 풍경 위로 ‘안나 카레니나’의 멋진 젊은 장교 브론스킨이 겹쳐지고 아무 계절이라도 좋지만 때는 겨울, 하얀 눈발마저 날리는 상상은 늘 나를 행복하게 했다.

잠자리에 누워 오늘 내가 만난 자작나무를 떠올려본다. 자작나무의 꽃말은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데 어쩌면 이들은 여기 이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일 그들과 보낼 아침을 상상하며 잠을 청한다.

이른 아침 산속의 공기는 청량하고 잠에서 막 깬 아침 햇살은 부드럽게 찰랑거릴 것이다. 달콤한 믹스 커피 한 잔 들고 자작나무와 마주할 때 이름 모를 새들이 찾아와 우리의 이야기를 거들고 지나던 바람도 기웃거리며 잠시 머문다면 참 좋겠다.

잎들은 햇볕에 알알이 반짝이며 저마다 간직한 얘기를 종알대겠지. 그리고 묵묵히 서 있던 그가 하얀 옷을 벗어 ‘당신을 기다렸어요.’라고 쓰인 연서(戀書)를 건넨다면 나는 무엇으로 화답할까.

자작나무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지 그의 떨리는 그림자가 창문에 어른거린다. 짧은 여름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최미경 약력>
▲대한문학 등단
▲무진주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회원
▲저서: ‘찻물을 끓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