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눈썹을 밀며 - 수필 허문정 |
| 2020년 12월 21일(월) 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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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눈썹으로 상징화해 아름다운 시로 남은 시인의 첫사랑처럼, 누군가의 진한 그리움이 되어 보지 못한 눈썹이지만, 선명한 새벽달처럼 수정하며 편안한 모습 지어 본다.
열정이 남아 있던 사십 대까지만 해도 서른 열 살, 서른 열 한 살 하며 마흔이란 나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편한 것만 찾아 몸무게가 늘고 눈썹 손질도 잘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잔주름에는 민감해 눈썹을 족집게로 뽑으면 눈두덩이 처질까 봐 미용 눈썹칼로 살살 민다. 마음을 비우기엔 아직 멀었다. 젊고 풋풋할 때는 피부관리에 소홀하다가 탄력을 잃고 나서야 안타까워하는 우둔함을 어찌하랴.
눈썹을 밀며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가슴엔 애증만 가득하다. 그러나 여자에게도 남자들 수염처럼 밀어도 좋은 눈썹이 있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세심한 조물주의 남녀 균등한 배려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남자들은 수염을 밀며 무슨 생각을 할까? 요즘 ‘워런 버핏’이 자기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하여 세간의 찬사가 쏟아진다. 그는 ‘질레트’라는 면도기 회사에 투자해서 수십 조의 재산을 모았다는데, “나는 매일 밤 전 세계 남자들의 수염이 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라고 했다니 그 발상이 기발하고 흥미롭다. 행운도 따랐겠지만 뛰어난 안목으로 세계 제2의 갑부가 될 수 있었는가 보다. 우리나라와 달리 기부를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선진국 부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도 진즉 수염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남자들이 턱에 흰 거품을 잔뜩 바르고, 혹은 전기면도기를 사용하며 요쪽저쪽 혀를 알사탕 모양으로 밀어 넣고 요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짧은 모노드라마 같다. 베일까 조심하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면도하는 모습은 활력 있고 유쾌하다. 면도 후에는 출근이나 외출 같은 활동적인 장면이 연상되는데, 여자들이 눈썹을 밀면 왠지 여유와 사색 같은 정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눈썹은 밀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남자들은 수염을 깎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또 눈썹은 문신을 하기도 하는데 수염은 문신이 없고, 멋을 내느라 여자들은 눈썹을 미는 반면 남자들은 수염을 기른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과 ‘꼭 해야 하는’의 차이에서 남녀의 묘한 대비를 본다.
눈썹과 수염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다듬어진 눈썹만큼 곱게 살아온 건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곱게 살아낼지 조금은 걱정된다.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했고, 좀 더 뜨겁게 살지 못했다. 지금 아는 것을 진작 깨달았더라면 더 열정적으로 살지 않았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젊어서는 ‘여자’로 나이 들면 ‘엄마’로 사는 것을 당연시했으나, 요즘은 ‘여자’와 ‘엄마’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이다.
나는 속내를 감춘 채, 표면적으로는 엄마로 살았다. 당당히 여자의 주체성을 주장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비위 맞추며 살았다. 등에 얹힌 짐을 훌훌 벗어내지 못하고, 출생 서열 하나만으로도 버거움을 느꼈다. 간밤에도 집안 일로 속을 끓였는데, 내 손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내가 손을 놓을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품어 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부대꼈다. 나도 힘들다는 말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나도 ‘워런 버핏’처럼 부자가 되어 내 몫 멋지게 살고 싶은 속내를 거울 속 짙은 눈썹에서 본다. 관습에 매어 날지 못하는 욕망이 눈썹 속에 갇혀 있다.
하나 뭐든 부족하다고만 느끼던 나에게 솎아 낼 눈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밀어내고 다듬을 눈썹마저 부족한 사람이 많은데 나는 눈썹 부자다. 눈썹도 나눠 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니 반전되는 생각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밤새 한 근심들은 나를 좀 더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성숙시킬 것이다. 이제는 가위 눌리지 않고, 당당히 살아야겠다.
“도와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면 네가 그 사람들보다 부족해라, 그러면 다시는 네게 와서 손 내밀지 않을 것이다”는 어느 어른의 말씀처럼 나에게 기댈만하니까 기대는 것일 테니 감사한 삶이다.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절망하던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밤을 뒤척인 쓸쓸함으로 새벽 눈썹을 밀던 손 거두고, 이제 딸그락거리며 아침을 열리라.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손거울에서 눈썹이 꿈인 듯 사뿐 날아오른다.
<허문정 약력>
▲월간문학 수필 등단, 시와사람 시 등단
▲광주문협, 대표에세이, 무등수필 회원
▲시와사람시학회, 죽란시사회 회원
▲시집 ‘어린 애인’, 수필집 ‘눈썹을 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