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사랑방 / 수필 박명순 |
| 2021년 01월 18일(월) 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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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램이나 해줄리트, 주자청도 만나고 정목일, 피천득, 윤오영, 박연구도 만난다. 대문호들의 작품을 통하여 삶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명작은 숱한 고뇌와 고독을 체험하지 않고는 탄생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게 있어 사랑방은 정이며 사랑이고 추억이다. 그리고 희망이다. 문득 유년 시절 시골집 사랑방 풍경이 보인다.
쇠죽을 끓이는 사랑방 아랫목은 늘 따뜻했다.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땀 냄새가 퀴퀴해도 구수한 옛날얘기가 있어 좋았다. 마을 어른들이 모여 앉아 새끼를 꼬고, 소쿠리나 망태도 만들고 가마니를 짜고 짚신도 삼았다.
지금 생각하니 옛날에도 사랑방은 짚 예술의 산실이었고, 조상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공예가들이었다. 사촌형은 어린 것이 하라는 공부는 않고 사랑방이나 기웃거린다며 역정을 냈지만 그래도 그 방이 좋았다.
사랑방은 때로는 동네 청년들의 닭서리, 수박서리, 단감서리 작전모의장이기도 했다. 우리 동네 청년들은 주로 자기 집 것을 부모 몰래 서리해서 친구들끼리 나눠 먹었다. 한 번은 이웃마을로 닭서리를 갔다. 닭장 채 들고 오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마을 간 싸움으로 번져 온 고을 전체가 떠들썩했었다.
그 사건 이후 한동안 뜸했던 악동들의 서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 번은 시냇물을 건너고 산 고개를 넘어 먼 곳에 있는 감 과수원으로 단감서리를 갔다. 대여섯 명이 갔는데 한 살 터울인 내 동생도 끼어 있었다. 단감밭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친구들은 무작정 감을 따기 시작했다.
나는 어른들에게 들었던 ‘돌다리도 두드려 보라’는 말이 생각나 우선 한 개를 따서 베어 먹어 보았다. 떫은 감이었다. 단감나무와 떫은 감나무가 섞여 있는 게 분명했다. 다른 애들은 정신없이 따기에 바쁘고 나는 동생을 데리고 여기저기 헤치고 다니며 단감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마침내 단감나무를 발견했다. 동생하고 둘이서만 실컷 땄다.
돌아오는 길에 산 고개에서 쉬게 되었다. 다들 자기가 따온 감들을 먹어보기 시작했다. 거의가 떫은 감이었다. 왜 친구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을까? 내 유년 시절에는 놀부처럼 심술보 하나가 더 달려있었지 싶다.
사랑방에 모였던 어르신네들은 이제 마을 앞동산 공동묘지에 거의 묻히고 닭서리, 단감서리 주인공들도 더러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사랑방도 사라졌다. 하지만 고향 냄새, 담배 냄새, 땀 냄새, 쇠죽 냄새는 가슴 깊이 서려 있다.
인생 후반기에 다시 도시의 사랑방을 찾은 것은 알고 보면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그 산실인 사랑방이란 정겨운 이름 때문이다. 삭막한 도시에 ‘사랑방’이라니……
오늘도 사랑방에 앉아 내 삶을 되돌아보고 일상(日常)을 살피며 나를 정화한다. 하찮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가치를 찾는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인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 그 자체이지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란 것을 깨우친다.
나부터 경제만능, 물질만능주의에 매몰된 삶의 태도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효율, 실용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사회흐름을 바꾸고 싶다. 혼자 꾼 꿈은 그저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삭막한 도심에 생각과 꿈이 닮은 사람끼리 모여 오순도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방을 가졌다는 건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이지 싶다.
<박명순 약력>
▲대한문학등단 (2013)
▲책여세 수필문학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대한문학작가회, 곡성문인협회, 삼다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