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교수의 일본 작가 비평](21)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적 삶 지향

2021년 01월 27일(수) 19:42
도쿄 공습으로 초토화된 도쿄시내(1945년)
-패전을 맞아 처참한 현실에 망연자실-
해방의 해이자 일본에겐 패전의 해인 1945년, 마쓰다 도키코 주변에는 암운이 드리운다. 니가타(新潟)의 절에서 주지 생활을 하던 오빠 만주의 처가 세상을 등진다. 마쓰다는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쿄공습을 목격한다. 눈앞에서 건물이 파괴되고 인간의 피와 살점이 튀는 처참한 광경.

나카노구(中野區)의 자택도 불타 일기나 원고는 물론 가재도구 하나 건질 수 없었다. 자신의 집터에 주저 않아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망연자실하는 가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와 가족은 옆 동네로 이주해 그곳에서 패전을 맞이한다. 마쓰다는 패전의 날 일기에 “8월15일, 아침…. 이날도 아침부터 미국 비행기는 날아왔다. 나는 조용히 뺨에 흐르는 눈물을 감지하고 있었다”라고 적는다.

그 누구보다 절실히 일본이 평화의 길로 나서기를 염원해왔다. 포탄으로 산천초목이 시들고 그리운 고향이 온기를 빼앗긴 현실을 어찌 한마디로 형언할 수 있을까. 패전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녀의 심경은 제국주의와 침략주의로 치달은 조국에 대한 애증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됐을 터.

쇼와 천황이 방송을 통해 패전을 선언하자 마쓰다는 나카노역 출입구에서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름 구름이여
여름 구름이여
초록색 하늘의 끝을 담아
말없이 떠난 뒤
몸을 꼼짝하지 않는구나

부끄러움이 많아서
초토를 가린 채 고개를 숙이는구나
초원 같은 단백함
인간의 피로

여름 구름이여
거대한 사랑의 포로가 되어
꿈꾸는 눈동자를 보이는구나

넋을 잃고 바라본다.


상실의 마음이 구름에 담겼다. 전쟁에 광분한 위정자들에 대한 책망도 읽힌다. 마쓰다는 그러한 주체들의 행위를 누구보다도 부끄럽게 여긴 작가다. 그 부끄러운 행위가 결국 무력 공습을 불러와 모든 게 초토화됐다. 얼마나 허망했을까.

이런 도발과 무력이 판을 치는 현실에 남성적 폭력주의가 착근하고 있다고 본 마쓰다는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혼란기의 파고에 맞서 마쓰다는 여성의 주체적 삶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쪽으로 나아간다.

남편이 노동운동가이므로 가정에서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얻었던 터였다. 하지만 이상을 공유하던 남편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다. 육아와 출산 등의 문제로 부부 사이에는 앙금이 쌓여가고 있었다.


-사회통념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상 추구-
마쓰다는 남편이 잡지 편집 일로 약 6개월 동안 중국에 가 있는 동안 새로운 이성을 만난다. 자신이 ‘생사를 건 연애’라고도 표현한 사건이다. 이를 토대로 마쓰다는 ‘여자가 본 꿈’을 집필했다. 마쓰다는 이 작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통념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꿈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여성을 그린다.

“나는 자주 인생에서 도피하는 여자였다 첫 번째 어머니의 집에서, 두 번째는 숙부의 집에서, 세 번째는 자신이 이룬 가정에서….”라고 묘사한다. 이렇듯 그녀는 여러 잡지를 통해 자신의 연애와 사랑의 체험을 당당히 표현했다.

-첫사랑 얘기-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그 글에는 아라카와 광산 시절에 서로 열렬하게 러브레터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불태우던 첫사랑의 상대 고바야시 가츠로(小林勝郞)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녹아 있다.

참으로 도발적 발상이다. 자신의 사랑이나 감정표현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연히 드러내는 곳에 오히려 의의를 뒀기 때문이다. 결혼 후의 연애 상대자를 만나기 전에도 프롤레타리아작가인 하시모토 에이키치(橋本英吉)에게 열정을 새긴 편지를 보냈을 정도다. 문인 중에서 신 여성상을 몸소 실천하고 그려낸 장본인으로 볼 수 있다.

나혜석
국내 작가 중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유학파 출신 나혜석(1896-1948)이 떠오르는 까닭이 뭘까. 나혜석 또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주체적 삶을 지향한 신여성이다.

작가이자 최초의 여성 화가였던 그녀는 일본 유학 중 여자 유학생 중심의 진보적 잡지 발간에 앞장서며 여성의 조혼이 횡횡하는 사회 분위기를 격렬히 비판한다.

자신의 여성관을 담아 여성성을 주제로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고 귀국 후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한다. 진부한 인습에 사로잡혀 여성을 가사만 도맡는 존재로 보거나 주체성 결여의 대상으로 보는 견해에는 가차 없이 메스를 가한다.

신여성의 길을 개척하려는 정신이 누구보다 강렬했거니와 연애, 결혼, 출산에 대한 기존의 사고나 규범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녀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적지 않았다. 호사가들의 입방아에도 오르내렸다. 하지만 나혜석은 그 시대에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맞서 젠더 이슈를 공론화했다.

마쓰다 도키코 또한 그런 점에서 살피면 치열하게 분투한 삶을 살았다. 여성 인식의 기존 틀을 깨고 어떻게 양성평등을 실현할 것인지, 어떻게 여성의 주체성을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뇌하는 일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애와 여성성의 시점을 공공연히 밝히며 출산이나 육아, 가사 일에 얽매인 여성들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자신의 사랑과 연애를 테마로 삼은 작품 공개를 마다하지 않았고 관련 체험담을 여러 편 집필한 것은 그러한 시점에 근거한다. 나혜석보다는 반세기를 더 살았지만 ‘이혼 고백장’ 등을 발표한 나혜석과 비교, 동시대적 반추를 시도해볼 만한 사항이다. 즉 사회통념이 조장한 여성상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며 주체적 여성의 삶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나혜석과 견주어 논해볼 수 있으리라. 일본 유학 시절의 나혜석과 시인 최승구, 그리고 마쓰다와 6살 연하 연인(화가)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실은 마쓰다 부부의 중매인은 천황 암살 모의 혐의(대역사건)로 1911년 사형을 당한 후루카와 리키사쿠(古河力作, 1884-1911)의 친동생 후루카와 미키마츠(古河三樹松, 1901-1995)다. 미키마츠가 형의 영향으로 사상에 심취한 것은 당연지사. 미키마츠도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을 수용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출판사(平凡社) 일도 했으며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 다 아나키스트이니 조선의 자치와 독립에 공감하고 있었을 터.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이 조선 독립과 인간해방 정신을 강렬히 주창한 것이었기에.

일제강점기임에도 마쓰다의 조선 이해도는 다른 작가보다 월등하다. 마쓰다는 물론 남편도 뼛속까지 노동운동가인 만큼 그런 시대적 흐름 파악에 게으르지 않았다. 후루카와 형제의 활동을 좀 더 들여다보자.

리키사쿠가 추구한 이상은 모든 권력을 거부하고 지배구조 타파를 실현하려는 자치주의다. 그는 일본 아나키스트의 대부인 고토쿠 슈스이(行德秋水)와 함께 ‘대역(大逆)사건’을 모의한 혐의로 1911년 사형당한 12명 중 한 사람. 출신지는 일본 중부지방에 위치한 후쿠이현(福井懸).

재미있는 것은 큰 상인(대부호)을 배출한 후루카와 집안은 대를 잇기 위해 근친결혼을 했기에 단신이라는 점(아사히신문, 2010년 1월 30일 자). 키가 14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투철한 사상으로 고토쿠와 함께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를 거부하고 절대적 자유를 외치다가 요절했다. 경이로울 따름이다.

더 놀라운 것은 리키사쿠가 가쓰라 다로(桂太郞)수상을 사살하려고 수상관저 부근에 잠입한 일이다. 리키사쿠는 동료에게 품에서 단도를 꺼내 보이며 “이걸로 찔러서 사살하려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자백은 순식간에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퍼져 고토쿠 슈스이와 같이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미즈카미 쓰토무 ‘후루카와 리키사쿠의 생애’, 문예춘추, 1978).
간자기 교시가 메이지가쿠인대학 도서관에서 발견, 자신의 저서 혁명전설 대역사건의 사람들 3(하가서점, 1969)에 공개한 사진. 안중근 거사를 흠모해 고토쿠 슈스이가 작성, 서명한 위의 한시와 사진은 그림엽서로 제작, 동료들에게 배포됐다. 고토구와 연을 맺은 양심세력에게 안 의사가 영향을 미친 점을 필자 언급.(경향신문 2005년 5월5일 시론 -안중근 의사와 고토구 슈스이-, 2010년 소세키와 조선, 주오대출판부)

이리하여 1909년 리키사쿠는 고토쿠와 내연의 처 간노스가(管野スガ, 같은 혐의로 사형)가 창간한 ‘자유사상’의 명의인으로 이름을 올린다. 안중근 의사가 세상을 뜬 2개월 후인 1910년 5월에는 동료들과 함께 폭발물단속 위반 혐의(천황암살 계획)로 검거된 바 있다. 하지만 실은 1909년부터 그 계획을 진행해온 것으로 드러났다(안중근 거사 8일 후에 시험폭발 등, ‘소세키와 조선’, 2010).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
동생 후루카와 미키마츠는 형이 사형을 당하자 가족을 떠나 상경, 같은 활동에 매진한다. 그런 와중에 마쓰다와 오누마 와타루(大沼 )의 만남을 주선해 부부의 연을 맺어준다.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의 ‘노동운동사’에서.

당시 안중근 의사가 일본 아나키즘 활동가의 정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고토쿠의 소지품 속에서 안중근의 거사와 기개를 찬양한 한시가 안중근 사후 발견됐고(‘안중근 의사와 고토쿠 슈스이’ 2005년 5월5일 자 경향신문), 고토쿠와 아나키즘 활동을 하던 평민사(平民社) 일행이 안중근의 사진이 들어간 그림엽서를 제작해 배포한 것도 이미 알려져 있다.

한편, 고토쿠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한·일교류의 선례로 끊임없이 되새김해야 하는 이유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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