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봄은 오는데 / 수필 오경심 |
| 2021년 03월 15일(월) 1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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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거리 텃밭 울타리가 노란 개나리꽃으로 너울대기 시작하면, 강변에 차일이 펼쳐지고 동네 아낙네들을 위한 굿판이 벌어졌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강변으로 따라갔다.
새 옷으로 단장을 한 여인들 틈에서 남자들은 지게로 음식을 날랐고, 흥이 올라서 큰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어느새 박물장수 옆에는 풍선이 나부끼고, 화려하게 꾸며진 좌판 앞으로 어린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촬촬촬 엿장수는 가위를 흔들며 신나게 엿을 잘라 맛보기를 선사하는 중에, 맞은편에서 벌써 취한 듯한 봉임이 할머니가 저고리 고름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우리 쪽으로 비뚤비뚤 달려오더니 내 할머니의 손을 덥석 낚아채서는 차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할머니가 끌려가는 동안 나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할머니를 쫓아가다 손을 놓치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할머니를 따라 이런 장소에 와보는 것도 처음인데 하필이면 우리 할머니를 끌고 가는 게 불안하고 못마땅했다. 이어서 할머니 입에 술잔을 들이대며 몸에는 장구가 걸리더니 채가 주어졌다.
그날의 장구잡이는 우리 할머니였다. 나는 내 할머니가 그렇게 신명 나게 장구를 두들기는 것을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외톨이가 되어버린 나는 누가 와서 내 할머니를 말려주거나, 할머니가 빨리 끝내고 나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차일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굳었던 얼굴이 점점 펴지면서 장구채에 신명이 더해지고 있었다. 장구 소리는 석양이 지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내 할머니 금정댁은 만석꾼으로 소문난 허씨댁 따님이었다. 시집올 때는 풍악을 울리며 많은 짐과 함께 하인을 대동하고 떠들썩하게 소문을 싣고 왔다고 한다. 일본에서 공부를 하신 할아버지가 돌아와 도회지에 새살림을 차릴 때도 할머니는 시부모님 곁에서 큰 며느리의 본분을 지키며 묵묵히 사셨다. 시청에 근무하시던 할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빨치산의 총에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는 본가에서 시어른들을 모시고 외아들 내외와 함께 살다가 효자로 소문난 그 외아들마저 한국동란 때 잃게 되었으니 그 후, 할머니의 삶은 넋이 나가 버린 인생이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집에는 증조부모님이 계셨다. 증조할아버지는 면소재지에 하나뿐이었던 초등학교가 우리 마을에서는 너무 멀다고 생각하셔서 인근에 새 학교를 유치하는데 크게 공을 세운 분이었고 내가 다녀야 할 삼기남교의 운영위원이셨다. 그러나 아들에 이어 젊은 손자까지 잃어야 했던 가정의 비극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계신 어른으로 그 속마음이 오죽하셨으랴.
집안 분위기는 항상 조용했다. 저마다 가슴에 돌을 하나씩 품고 무거워서 입도 열지 못했으리라. 시대의 아픔을 벅차게 껴안고 살아야 했던 내 할머니 금정댁의 삶. 위로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혼자된 며느리를 단속하고 섬기며, 피난처는 오로지 일밖에 없었으므로 할머니가 손을 편히 놓고 계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우리 할머니를 작은방 할머니라고 불렀다. 큰방을 쓰시는 증조부모님 내외분이 계셨기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던 것 같다. 누가 깰세라 아침 일찍 일어나 조반을 준비하고 식사가 끝나면 밭으로 나가셨다. 점심을 거르는 때가 많았는데도 할머니는 당신의 생활 습관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뿐인 손녀인 내게도 애틋한 사랑 표현이 없었다. 겨울철에 할머니 옷이 춥게 보여서 식구들이 걱정을 하면 ‘이 추운 날 맨땅에 누워 있는 사람도 있는데 옷을 입은 당신이 춥겠느냐’고 껴입기를 마다하신 할머니. 할머니가 봄날 나와 함께 들녘에라도 나가면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봄에는 죽었던 새싹이 다 돋아나는데 사람은 한번 가면 왜 다시 못 오는가.” 하는 구슬픈 곡조의 흥얼거림이었다.
시국을 잘못 만난 탓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을 비명에 떠나보낸 할머니는 이후 누구에게도 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집안, 가라앉은 분위기가 감지되어 나도 그렇게 자주 병치레를 했을까? 아파 누워 있는 내 곁에서 할머니는 가끔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렸다.
그런 할머니가 오늘 장구채를 잡은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쉬지 않고 치는 할머니의 장구 소리는 들녘을 돌아와 내 귀를 울렸다. 며칠 건너 인근 마을 수산에서도 화전놀이를 한다는 소식을 학교에서 들었던 것 같다. 강변에서 그 광경을 본 후, 할머니를 그곳으로 놀러 가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린 소견에도 할머니를 시름에서 떠나 흥겹게 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조반상을 받으신 증조할아버지 앞에서 화전놀이 구경 가고 싶다고 졸랐다. 흰 무명 새 옷으로 갈아입은 할머니의 나들이가 좋아서 나는 손을 잡고 가다가 업히기도 하면서 아버지의 전설 같은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억지로 사는 사람처럼 항상 그렇게 슬퍼 보였다.
최근 들어 갑자기 내 주변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친한 친구가 불시에 우리 곁을 떠나가고, 아침저녁 마주치던 이웃을 영안실에 가서 조문해야 되는 일이 생긴다. 그들이 아버지와 남편의 이름으로 살아왔던 시간들, 또 가족이나 친구의 이름으로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 그 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짧은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젊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일 년 뒤에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를 봤다. 그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아들 곁에 묻어 달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심정일 것이다. 봄은 다시 찾아오고, 대지는 감았던 눈을 떴다. 봄의 들녘에 서면 지금도 어디선가 들려 오는듯한 할머니의 타령조의 노래, “봄이 오면 온갖 풀들이 다 돋아나는데 네 애비는 왜 한 번 가서 다시 못 오느냐”고 한탄하던 우리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속 골병이 들어버린 할머니가 떠나가신 지도 오래되었고, 나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증조부모님도 떠나신 지 오래되었다. 봄은 다시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와서 들녘에는 생명들이 넘실거린다. 봄이 오는 들녘에 서면, 내 귓가에서는 할머니의 구슬픈 노래와 장구 소리가 아련하다.
<오경심 약력>
▲ 전남 곡성 출생
▲ 교육대학원 석사
▲‘수필과 비평’ 등단(2001)
▲ 수필집 ‘눌러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