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몇 마디 - 김종 시인

2021년 03월 15일(월) 19:02

▲만물은 채우고 비우는 두 구간의 순환성으로 생명세상이 지탱하는 것 같다. 움터서 꽃피고 열매 맺는 일이 채우는 부분이라면 열매가 여물이 들어 익을 때까지가 물을 비우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현상적으로 물이 흘러들어 다다른 곳은 ‘바다’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길 찾아 떠나는 유랑”일 것이다. ‘링거줄 같은 너로 하여’ 숨소리가 시작되고 측정한 계량기로 생명 값을 매기며 피고 지는 꽃들과 ‘허공 가득 흔들리는 침묵’의 숨소리가 노 저어 간다.

▲‘운명’은 인간을 비롯한 여러 현상들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을 일컫는다. 화자는 소생의 봄을 기다리는 자연의 의지로서 만삭에 든 겨울을 제시한다. 겨울은 조락의 계절 가을을 지나고 다다른 공허의 시간이다. 그걸 ‘만삭’으로 표현한 양홍 시인은 비워야 충만에 이를 수 있다는 아포리즘을 보이며 ‘도전’을 주문한다. 욕망과 좌절과 불안과 초조 따위는 두루 불가해한 힘에 의해 지배되고 이럴 때 ‘운명’은 가혹하다는 표현을 넘어 겨울을 거쳐야 봄날에 다다른다는 이치의 발견을 ‘도전’에 묶어서 배우게 한다.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물들일 때 활짝 열어젖혀 심호흡하는 화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 자리에 환한 미소의 ‘홍매화’는 느닷없는 횡재처럼 반갑기만 하다. 모르긴 해도 시<허락하지 않는 시간>이란 별 생각 없이 창문을 열었는데 뜻하지 않게 황홀한 홍매화를 마주한 일을 두고 “나도 몰래 음악에 젖어/온몸 바람을 탄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봄바람 사그라질’까 조바심 대며 이파리를 터트리고 햇살에 되비친 홍매화의 분홍빛 이미지는 ‘서글픈 날’을 서글플 새 없는 대지로 펼쳐낸다.

▲춘삼월 화전놀이에서 시작된 수필 <봄이 오는데>는 작품 전편에 만년설처럼 녹지 않는 슬픔이 깔려있다. 시집올 때 할머니는 풍악을 울리며 하인을 대동한 만석꾼의 따님이었지만 빨치산에게 남편을 잃고 아들에 손자까지 먼저 보내야 했던 비극의 여인이다. 오늘은 그 할머니가 장구채를 잡고 화전놀이판을 신명나게 누비시는 것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새봄맞이에서 한스러움을 반추하는 할머니는 하나뿐인 손녀에게까지 애정 표현을 아끼시며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 살아오셨다. 봄이 오는 들녘에 서면 환청처럼 들려오는 할머니의 노랫소리와 장구소리가 잔잔히 여울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