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410) 남은 성터에는 저녁연기만이 펄펄 피어오르네 |
| 2021년 04월 06일(화) 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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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눈 내리는 가운데 고려의 빛 떠돌고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 소리 같은데
남루에 홀로 섰 노니 저녁연기 오르네.
雪中前朝色 寒鐘故國聲
설중전조색 한종고국성
南樓愁獨立 殘廓暮烟香
남루수독립 잔곽모연향
송도는 지금의 개성이다. 화려했던 500년 고려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던 도시건만 조선왕조가 새롭게 들어서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폐허가 된 도시다. 이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포은이 마지막 숨결을 거뒀던 선죽교가 있는 곳이다.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으로 착잡했음을 보이는 시상이 면면히 흐른다. ‘눈이 온 가운데 옛 고려의 빛은 은은히 떠돌고 /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와 같다’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남은 성터에는 저녁연기만이 펄펄 피어오르네(松都)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황진이(黃眞伊)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함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춰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진 인물이다. 10년을 수도한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벽계수를 시조 한 수로 도취시켰다는 일화로 알려진다. 또한 송도삼절로도 널리 알려진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눈이 온 가운데 옛 고려의 빛은 은은히 떠돌고 /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와 같다네. // 남루에 올라 수심에 겨워 섰노라니 / 남은 성터에는 저녁연기만이 펄펄 피어오르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송도를 노래함’으로 번역된다. 조선 500여 년간 전 왕조였던 고려와 함께 고려의 수도 송도를 그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그 이름을 빛나듯이 고려의 안타까운 역사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 초 길재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송도를 찾아 옛 역사를 떠올렸다. 조복을 벗고 산에 들어 영원히 나오지 않았던 고려의 충신도 그랬다.
시인도 송도를 찾아 그런 생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선경(先景)에 의한 경치 구에서는 빛과 소리를 듣고 송도를 떠올리는 시낭(詩囊)을 털어 낸다.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이 떠돌고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와 같다고 했다. 고려 시대에 울렸던 종소리까지도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깊은 소회를 읊고 있다.
화자는 깊은 시심은 누락에 올라서도 마찬가지였음이 시상 주머니에 가득 차 있음을 알게 한다. 남루에 홀로 올라 수심에 겨워 섰노라니,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가 곱게 피어오른다고 했다. 결구와 승구는 의미상으로 보아 그 자리를 바꿔 두었더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시상의 구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한자와 어구
雪中: 눈 가운데. 눈 속에도. 前朝: 옛적의 조정. 곧 ‘고려’를 뜻함. 色: 빛. 寒鐘: 차가운 종소리. 故國: 옛 나라. 곧 고려. 聲: 소리. // 南樓: 남쪽 누각. 愁: 수심. 수심에 겨워서. 獨立: 홀로 서다. 殘廓: 남은 성터. 暮烟: 저녁연기. 香: 향기가 나다. 곧 ‘피어오르다’는 뜻.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